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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에서 아픈 역사를 만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아픈 역사를 만나다>
2018.10

문화

서울 인문학 살롱

잘 생겼다! 서울 인문학 살롱 ⑨

덕수궁 돌담길에서 아픈 역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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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면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아갔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이 개방되고, 10월 말이면 덕수궁 돌담길 전체가 개방되어
정동에는 ‘연인의 길’뿐만 아니라 ‘왕의 길’에 대한 이야기도 흐르게 된다.




1896년 2월 11일 뿌옇게 아침이 밝아오는 시각, 궁녀용 가마 두 채가 경복궁 건춘문(경복궁의 동문, 왕족의 친척과 궁 안에서 일하는 상궁들만 드나들던 통용문)을 나와 미명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건춘문을 열어준 경비병들은 엽전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그 가마 안에는 누가 있었으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경복궁에 있어야 할 고종이 난데없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김홍집·유길준 등 당시 집권 내각의 실세 친일파 5명의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해 처형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궁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나라의 정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처신하겠다는 격문을 발표했다. 그 가마에는 고종과 왕세자(순종)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왕과 왕세자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버리고 피신한 이 치욕적인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아관파천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국제 정세와 함께 풍전등화 같던 조선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 대륙 침략의 야욕에 가득 찼던 일본은 대국이던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에 대한 우월권 확보는 물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아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정세가 러시아 쪽으로 흐르자 조선에서는 명성황후를 필두로 러시아와 손잡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 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해 친러정책을 권유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늘 공포에 떨었던 고종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와 반목하던 대원군과 결탁해 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친일파 김홍집 내각은 양력 사용, 군제 개혁, 단발령 실시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고 궁궐 안팎의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와 왕실 적대자들로 교체해 고종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고종과 왕세자는 적의 손아귀에 잡혀 무력해졌을 뿐 아니라 황후가 시해당한 후 늘 공포에 떨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인 언더우드 여사가 쓴 <조선 견문록>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공사들은 명성황후가 잔인하게 암살된 것에 깊이 분노하고 고종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했으며, 사건 후 한동안은 날마다 대궐을 방문했다고 한다. 고종은 조선인 통역은 믿을 수 없다며 언더우드 목사를 통역으로 요청해 그 역시 매일 대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 부인을 비롯한 공사관 부인들이 고종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대궐로 보냈는데, 독살의 공포를 느낀 고종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딴 깡통 연유나 깬 달걀 요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음식들은 자물쇠를 단 통에 넣어서 보냈고, 열쇠는 언더우드 목사가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순헌황귀비

아관파천의 주역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진명·숙명여학교를 세우고 양정의숙에는 거액을 기부하는 등 교육 사업에 매진한 여걸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신과 함께 있는 고종

돈덕전의 고종과 순종, 영친왕 (190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손탁호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글로리아호텔의 실제 모델인 손탁호텔.해외 유학파들은 이 호텔의 카페에서 외교전을 펼쳤다.

엄 상궁의 치밀한 전략으로 성공한 아관파천

이렇듯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었던 고종 곁에 홀연히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상궁 엄씨로, 훗날 순헌황귀비가 되는 엄비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해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다섯 살 때 궁궐에 궁녀로 들어와 명성황후의 비서실장 격인 시위상궁까지 오른 엄 상궁은 못생기고 뚱뚱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승은을 입었다. 이에 격분한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쫓아내자, 결국 을미사변까지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다 을미사변 이후 부름을 받고 다시 입궐해 고종의 가장 측근인 대전 지밀상궁이 됐다. 엄 상궁은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동안 고종을 보필하면서 영친왕까지 낳아 후궁 중 최고 자리인 귀비까지 오른 입지전적 여인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빠른 판단력 그리고 두둑한 배짱으로 정국을 쥐락펴락했다. 명성황후가 고종 시대의 전기를 이끈 여걸이었다면, 엄비는 후기를 이끈 또 한 명의 여걸이었다.

한편 궁 밖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파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실시 등으로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범진 등 친러 인사들이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군인 800명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갔으나 내부자의 배신으로 역공을 당한 ‘춘생문 사건’도 일어났다. 이범진 등 몇 명만 간신히 피해 살아남고 주동자는 모두 처형당했다. 이에 일본은 궁궐 경비를 일본식 훈련을 받은 훈련대로 강화하면서 고종과 왕세자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고종의 은밀한 요청에 따라 이범진은 이완용 등 친러 인사들, 엄 상궁과 함께 다시 2차 탈출을 계획했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엄 상궁의 탈출 준비는 치밀했다. 궁녀용 가마를 타고 수시로 궐문을 드나들며 경비병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뿌려 의심의 고리를 풀어놓았다. 아관파천 당일, 엄상궁은 가마 두 대를 준비해 시녀와 나눠 타고 건춘문을 나섰다. 경비병들은 늘 있던 일이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의 손에는 엄 상궁이 준 엽전 꾸러미가 쥐여졌고, 경비병들은 뜨끈한 국밥에 탁배기 한 사발을 할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그 시각 러시아 공사관에는 수병 150명이 집결한 채 고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조선 보호라는 명목하에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을 탈취했고, 다른 열강들은 기회 균등을 요구하며 전차·철도 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했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여했다. 작고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경제는 갈갈이 찢겨나갔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자,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태도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했다.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을 단행했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인 이유는 당시 정동 부근에 각국의 공사관이 운집해있었기 때문이다. 환궁 후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영친왕, 순종, 고종, 순헌황귀비, 덕혜옹주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헌황귀비, 덕혜옹주

매일신보 호외

고종황제 흉거 당일 덕수궁 대한문 앞과 고종의 흉거 소식을 담은 <매일신보> 호외

정동

1970년대의 정동 모습

근대사의 비극적 서막을 연 역사 현장, ‘고종의 길’

고종이 경복궁에서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고 다시 경운궁으로 나온 아관파천 길은 당시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에 ‘왕의 길(King’s Road)’이라 표시되어 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이 지도를 토대로 ‘고종의 길’을 복원해 10월 덕수궁 돌담길과 함께 개방한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총 120m의 길로, 철문을 들어서면 조선왕조의 어진과 신주를 모시던 선원전 터가 보이고 오르막길 끝에 있는 문을 열면 정동공원이 있다. 고종의 길을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옛 러시아 공사

관의 3층 전망탑이 나온다. 길 자체는 보잘것없다. 석축과 담장도 새로 복원한 것이라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서막을 연 역사 현장이라 그런지 왠지 처연한 기분이 든다. 고종의 길 복원 계획이 발표되자 ‘치욕스러운 역사를 뭣하러 복원하느냐’는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이 길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의 길이자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가 아닐까?

고종의 길과 함께 개방되는 덕수궁 돌담길 또한 의미가 크다. 지금까지는 170m 구간이 영국 대사관 부지에 속해 있어 덕수궁 담장을 따라 길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영국 대사관 직원 숙소 앞에서 대사관 후문까지 100m 구간이 개방되었고, 70m(영국 대사관 후문~정문) 구간도 마저 개방되면서 덕수궁 돌담길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새로 개방되는 구간은 덕수궁과 영국 대사관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어 덕수궁 내부 보행로로 연결된다. 이와 함께 영국 대사관 정문부터 세종대로까지 이어지는 기존 돌담길도 새로 정비에 들어간다. 돌담을 따라 은은한 경관 조명을 설치하고, 걷기 편한 길로 도로를 새롭게 포장하는 작업을 10월 말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이 길까지 완공되면 덕수궁 대한문에서 시작해 덕수궁길, 미국 대사관저, 영국 대사관 후문, 덕수궁 내 보행로, 영국 대사관 정문을 거쳐 세종대로까지 덕수궁을 한 바퀴 빙 돌며 걸을 수 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광화문연가’)이란 노랫말도 있듯이 덕수궁 돌담길에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기에 왕의 길 이야기도 돌담을 따라 흐를 것이다. 더불어 정동에는 근대의 파란만장했던 역사가 아로새겨진 건축물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10월, 고색창연한 궁궐의 돌담길과 근대 건축물을 따라 느릿느릿 거닐어보자. 가을처럼 농익은 햇살과 시간이 소리 없이 느긋한 발걸음에 맞춰 함께 걸을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

돌담길 약도

영국 대사관 부지에 속해 미개방되었던 덕수궁 돌담길이 개방되면서 1,100m에 이르는 돌담길 전체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또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아가던 ‘고종의 길’이 복원되어 일반인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구한말 정동에 있던 각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미국 공사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1883년 푸트 공사 일행은 박동에 있던 묄렌도르프의 집에 잠시 거처했다가 정동에 있는 민계호의 사저를 구입해 입주했다.

프랑스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1895년 살르벨르가 바로크풍으로 설계한 프랑스 공사관. 공사관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인들의 집단적 거주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국가에 비해 위상은 약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처음에는 한옥을 개조해 사용하다가 1895년 완공핶다. 상림원이 있던 언덕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은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탈리아 공사관

이탈리아 공사관

1902년 을지로에 자리 잡았다가 서소문로와 마주한 곳으로 이주했다.

영국 공사관

영국 공사관

영국은 1884년 정동 4번가에 공사관필지를 매입하고 1891년 5월에 준공했다. 공사관 주변으로 성공회 성당인 장림교회와 성베드로 병원, 수녀원이 들어섰다.

독일 공사관

독일 공사관

독일 공사관은 1884년에 개설한 후 여러 곳을 옮겨다니다가 1891년 육영공원(현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로 이전했다.

벨기에 공사관

벨기에 공사관

1901년 정동에 처음 개설했으나 2개월 후 새문 밖에 있는 가옥으로 이전했으며, 1905년 회현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옮겼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나는 근대 문화유산

정동은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곳곳에 자리한 근대 문화유산을 만나다 보면 시간도 느리게 걷는다.

정동교회

정동교회

정동교회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주도해 1897년 완공한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빅토리아식 예배당이다. 주변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근대식 교육기관이 있어 자연스럽게 젊은 민족 지도자들의 항일운동 근거지로 사용되었다.

성공회 성당

성공회 성당

세계 건축가들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은 성공회 성당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한국식 기와를 얹은 지붕, 오방색 스테인드글라스, 한국식 창살 무늬 등 성당 곳곳에 숨어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 요소와도 잘 어울린다.

옛 러시아 공사관

옛 러시아 공사관

정동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다. 아치형 창문을 단 이국적인 전망탑 지하에서 공사관 본관의 밀실과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본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고 탑 부분만 남았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외관이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 건축물로, 학교 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해 복원했다.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와 여성 지도자가 이곳에서 배움의 열정을 불태웠다.

배재학당

배재학당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로 1885년 서양인 선교사가 세웠다.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체력 훈련을 통해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나도향 등 유명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 사진 속 건물은 배재학당 동관으로, 1916년 처음 완공된 당시의 형태가 대체로 남아 있다.

구세군중앙회관

구세군중앙회관

건축 당시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구세군중앙회관은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이 눈길을 끈다. 좌우대칭의 안정감 있는 구조와 높은 기둥을 활용해 웅장한 느낌이 드는 현관과 2층 예배당의 독특한 나무 지붕틀이 이색적이다.

이정은일러스트 조성흠사진 홍하얀

참고자료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지음),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송우혜 지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중앙문화연구원), <러시아 시선에 비친 근대 한국>(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정동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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