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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사

기획 · 서울 생활사 ②
종로의 여름밤
야시(夜市) 또는 여시(女市)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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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야시는 종로뿐 아니라 서대문, 용산, 인천,
개성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도 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야시 하면 으레 종로 야시를 떠올렸다.
종로 야시 가운데서도 여름 야시가 으뜸이다.
가로와 상점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룬 본정(本町, 충무로)이 남촌의 구경거리였다면,
북촌에서는 야시가 종로의 명물이었다.



불빛이 있는 풍경

“뚜껑 달린 호롱이었다. 깜깜한 밤이면 어머니는 휙 성냥을 그어 심지에 불을 붙이셨다. 호롱은 제 힘만큼만 어둠을 밀어내면서 방 안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는 때때로 내 속옷에 착 달라붙은 이를 잡으셨다. 재봉선을 따라 호롱불을 대면 타닥타닥 서캐가 탔다. 전깃불이 없는 시골 구석에서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전깃불이 꽉 찬 풍경을 처음 본 곳은 서울역이었다. 촌아이가 밤이 되어 서울역에 내렸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하겠는가. 무엇보다 눈이 부셨다. 제삿날 켜놓은 촛불 몇 개에도 낯설어하던 눈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서울역 불빛은 어쩌면 공포였다. 내가 서울역 앞에서 전깃불로 ‘개명’한 그때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하물며 이 땅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에디슨이 탄소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인 1887년 이른 봄에 경복궁 건청궁에 맨 처음 전깃불이 놓였다. 사람들은 이상야릇한 그 불빛을 일컬어 도깨비불이라 했다. 발전 시설 구입과 운영에 돈이 많이 들었지만 고장이 잦고 소음도 심해서 건달불이라고도 불렀다. 경복궁에 이어 창덕궁, 경운궁에 잇따라 전깃불이 들어왔다. 마침내 1900년 종로에 전등 3개를 달아 궁 밖에 사는 백성도 전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차를 밤 10시까지 운행하면서 매표소 주변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달랑 3개로는 가로등이라 할 수 없었다. 1901년 일본인 거류지에 길 따라 전깃불을 밝혔다. 거류민은 본정 5정목(충무로5가)에서 남대문로까지 길을 새로 닦은 뒤 가로등 30개를 설치했다. 그때 사람들은 그 가로등이 만든 밤 풍경을 ‘불야성(不夜城)’이라고 했다.

개벽에 실린 그림

1926년 <개벽>에 실린 그림으로, 전등불 밑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과 야시에 나온 여인들의 모습이 담겼다. 가운데에 있는 남자들의 옷과 모자가 이채롭다.

여름밤의 풍물시(風物詩), 야시

시간이 흐르면서 청계천 남쪽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가로등이 늘어났다. 가로등에 힘입어 1914년에 태평로에 야시가 처음 열렸다. 일본 사람이 식민지 경성에서 야시를 처음 여는 날, 시장에 만국기를 걸고 씨름판을 벌이면서 뭇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 무렵 청계천 북촌에 있는 종로의 밤은 어두웠고 상점은 일찍 문을 닫았다. 왁자한 명동과 쓸쓸한 종로,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의 밤은 그렇게 달랐다. 이 대조되는 모습이 식민 통치자로서도 그다지 좋을 것은 없었다. 일제는 1916년에 종로 시가를 번창하게 만들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꾀한다는 명목 아래 종로에도 야시를 열도록 했다. 종로에 야시를 처음 여는 날, 상인들은 보신각 근처 관우묘에서 장사가 잘되기를 빌었다. 밤이 되어 곳곳에 장등을 달고, 신구 악대가 연주를 하는 가운데 기생들이 야시 거리를 행진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경성 인구 15만 가운데 5만 남짓이 야시 개장 날에 몰렸다 하니 흥행 대성공이었다.

종로 왼쪽, 그러니까 남쪽 거리에서만 야시를 열었다. 종로 야시란 종로 화신상회 건너편에서 시작해 종로3가까지 이르는 큰길 왼쪽에 돗자리를 깔고 가스 등불을 켜서 불을 밝힌 다음 돗자리에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 곳이다. 사람들이 종로 남쪽 길로만 다니니 북쪽 상가는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전차 선로가 북쪽으로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북쪽 거리에서는 야시를 열 수 없었다. 1940년이 되어서야 전차 선로를 중앙으로 옮겼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만 빼고 야시는 해마다 열렸다. 1919년에 일제가 야시를 열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까’ 걱정했던 탓이다. 야시는 해가 갈수록 인기를 끌었지만 1940년 뒤부터 등화관제 훈련 때문에 폐지되었다. 해방 뒤 1947년 종로 1가부터 3가까지 야시를 다시 열었지만 1957년에 아예 없앴다.

한옥

최초의 가로등

종로 보신각에 가설한 최초의 전기 가로등과 종로- 남대문 사이를 오간 전차(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35년 동아일보에 실린 종로 야시 사진.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야시인가 여시인가

야시는 싸구려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가난한 상인이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깨지지만 않은 사기,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필 듯 말 듯한 과자, 팔다 남은 반찬, 푸석푸석 마른 과실, 처음 보는 상표가 붙은 비누, 한 번 빨면 해져버리는 수건 따위를 팔고 샀다. 야시장에는 생선 장수 다음으로 에누리 많이 해주는 온갖 장사꾼이 모였다. 그들은 목청껏 “싸구려, 싸구려”를 외쳤다. “골라잡아 세 가지 15전”, “낫구려 낫구려 싸구려가 낫구려”라며 7월 장마 때 악머구리 울듯 요란하게도 떠들었다. 어수룩한 사람에게는 바가지도 씌웠다. 싸면서도 비싼 곳이 바로 야시였다. 예전에 여자는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가마 ‘안’이나, 장옷·쓰개치마 ‘안’에 갇혔던 여자가 전깃불 아래 나들이를 했다. ‘야시 구경 핑계로 산보 나오는 부인네’라는 말에서 보듯이 여인들이 야시 거리를 걸었다. 여인들은 날품팔이로 돈을 벌어온 남편에게 몇 푼 받거나, 스스로 번 돈을 들고 늦은 밤 야시를 찾았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아서 ‘야시가 아니라 여시’라는 풍자도 생겼다. 그러나 여자만이 아니었다. 학생, 허름한 노동자, 양복 입은 신사도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야시 근처를 거니는 것을 취미로 삼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싸구려 야시는 구경 삼아 밤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산책로이기도 했다. 야시를 둘러 싼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로 어디쯤 숨어 있지 않을까. 언제 한번 당시를 상상하며 종로 왼쪽 길을 걸어보시길.

신가정

<신가정> 1933년 7월호에 실린 그림. 아무리 개화 세상이라지만 늦은 밤 야시를 찾은 여인은 꼴불견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최규진 수석 연구원은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한국 근현대 일상생활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쟁점 한국사-근대편>, <제국의 권력과 식민의 지식> 등 다양한 저서를 출간했다.

최규진(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수석 연구원)자료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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