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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은 시원하게 교류는 뜨겁게

냉면은 시원하게 교류는 뜨겁게>
2018.06

문화

문화 산책

남북 이야기

냉면은 시원하게 교류는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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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냉면, 평양 랭면
평양냉면이 다시 화제다.

평양에는 그 도시의 냉면이 있고, 서울에도 평양냉면이 많다.
두 도시는 냉면으로 이어져 있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북한 정부와 평양시가 가장 자랑하는 음식, 냉면

연전에 서울시에서 남북 교류 아이디어 현상 공모 사업을 했다. 실은 나도 이 사업에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은 평양보 다 평양냉면집이 더 많고 인기 있는 도시다, 평양은 원조 도 시다, 두 도시가 냉면으로 교류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놀랍게도 이 제안이 3등상인가에 당선되었다. 정치적 교류도 중요하지만, 오랫동안 서먹서먹했던 사이는 원래 음식으로 푸는 게 답이다. 술 한잔 곁들여 음식을 먹다 보면 마음도 풀어지게 마련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정상이 나눈 음식 중에 평양냉면이 있었다. 조리복을 입은 북한의 옥류관 요리사들이 뽑은 면을 들고 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 다. 면이 불을까 봐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평양냉면은 북한이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음식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식당에서 냉면을 팔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 위원장 부자도 하나같이 이 냉면을 자랑했다. 7.4 남북공동성명,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교류에서도 냉면은 빠지지 않았다. 북한 지도자들 은 아예 냉면 소개 책자 앞에 큼지막하게 대략 이런 말을 써 놓고 있다.

“평양 랭면은 민족의 자랑스러운 음식입니다. 이 좋은 음식 을 잘 보존하고 더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북한의 냉면 조리서를 여럿 찾아보았는데, 문장은 다르지 만 비슷한 내용이 꼭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옥류관 말고도 평양에는 냉면 파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사람들로 북적인 다는 외국 기자의 방문기가 많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냉면을 먹었는지는 잘 모른다. 고려 시대에도 냉면이란 말이 나온다. 대체로 현재와 같은 냉면 이 확립된 것은 조선 중·후기 이후로 본다. <동국세시기> (1849), <시의전서>(19세기 후반)에 냉면을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현재의 냉면과 유사하다. 이때 이미 평양냉면이 이 름을 날렸다. 일제강점기에 창간한 유명한 잡지 <별건곤>의 평양 탐방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것은 겨울의 냉면 맛이다.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 방 안에는 바느질하시며 <삼국지>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고요히 고요히 울리고 있다. 
눈앞의 글자 하나가 둘, 셋으로 보이고 어머니 말소리가 차차 가늘게 들려올 때 ‘국수요~’ 하는 큰 목소리와 같이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冷麵)이다. 살얼음이 뜬 김장 김칫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별건곤(別乾坤)> 1929년 12월호, 김소저의 ‘사시명물 평양냉면’ 중에서

서울에도 오랜 역사의 냉면집들이 있었다

이것은 집에서 냉면을 눌러 먹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기 본적으로 냉면은 겨울 음식이었다. 그 이유가 있다. 첫째, 메밀은 초겨울에 주로 수확한다. 시원한 동치미나 김칫국 이 있어서 말아 먹을 수 있다. 돼지나 닭, 꿩을 잡는 것은 아 무래도 농한기인 겨울의 일이다. 이래서 냉면은 겨울에 이가 시리게 덜덜 떨며 아랫목에 앉아 먹는 음식이었다. 이 장면 을 묘사한 시인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백석(1912~1996) 이 냉면을 소재로 시를 썼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시 ‘국수’ 부분으로, 1941년 <문장>에 발표.
?‘히스무레’는 희끄무레, ‘슴슴하다’는 간이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하다, ‘쩡하니’는 차갑고 시원한 것, ‘동티미’는 동치미, ‘댕추가루’는 고춧가루를 이르는 말.

집에서 눌러 먹던 냉면은 이내 상업화의 길을 걷는다. 시내 에서 사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빙 공장이 생기고 고기 소비가 늘면서 김칫국 대신 고기로 육수를 내어 대중화에 성공했다. 1930년대에는 이미 평양과 서울(경성)에 냉면집 이 꽤 많았다. 냉면집 배달부가 파업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 에도 여러 건 실렸을 정도로 흔한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서울 최초의 냉면집은 우래옥(1946~)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해방 후 최초에 해당하고, 실제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 냉면집이 많았다고 한다.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하여 ‘고종냉면’이라고 부르는 면이 일제강점기 초 기의 요릿집에서 재현되어 팔렸다. 또 서울이 본격적인 식민 도시로 성장할 무렵 많은 냉면집이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은 본격적으로 냉면집의 격 전지(?)가 된다. 원래 겨울 음식이었지만 여름 별미로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게가 창업한다. 해방 공간(해방 후 정부 수 립까지의 기간)에 많은 냉면집이 다시 발행하기 시작한 <독립신문> 등에 실은 개업 광고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서울이 평양 못지않은 중요한 냉면 도시 임을 자부해도 될 듯하다. 평양은 원조, 실제 가장 널리 퍼 진 곳은 서울인 셈이다. 평양냉면 먹는 법에 대해서는 한동 안 왈가왈부가 많았다. 대략 이런 문제였다.

면스플레인? 하나로 통일된 정석은 없다

첫째, 가위로 면을 자르지 않는다. 면은 길어서 장수를 상징 하는데 그걸 자르면 어쩌냐는 게 평양 사람들의 주장이다. 면이 너무 짧으면 물리적 촉각이 줄어서 씹는 맛, 목 넘김이 떨어진다. 그러나 아이나 씹는 힘이 떨어진 분이라면 잘라 먹어도 당연히 무방하다.

둘째, 식초와 겨자 논쟁이다. 한동안 서울의 냉면 마니아들 은 이것을 넣지 않고 먹는 게 미식가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 다. 그러던 중에 이번 남북예술단 교류에서 평양발(發) 동영 상 하나가 화제가 됐다. 옥류관 냉면에 식초, 겨자는 물론이 고 붉은 양념도 넣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평양도 냉면은 끊 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랜 전통인지는 알 수 없 다. 이유도 해석이 많다. 과거 냉면 육수는 위생이 걱정되어 식초로 소독해서 먹었다는 얘기다. 너무 차가운 음식 때문 에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 겨자로 더운 기운을 보충한다는 말도 있다. 붉은 양념(고춧가루)은 전통적으로 냉면집 식탁 에 고춧가루 단지가 놓여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역시 전통이 오래된 것 같다.

서울에는 서울의 냉면이 있고, 평양에는 평양의 랭면이 있다. ‘냉랭’한 것들이지만, 오히려 그 속에 뜨거움을 식히는 절묘 한 기운이 있다. 마음은 뜨겁게, 교류 사업은 냉정하게 서로 의견을 모아서 민족의 교류가 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냉면 한 그릇 하러 가야겠다. 냉면 만세!

박찬일은 ‘글 쓰는 셰프’로 불리는 요리사 겸 칼럼니스트. 저서로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미식가의 허기> 등이 있다. 맛과 글에 대한 칼럼을 각종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으며, 현재 ‘로칸다몽로’와 ‘광화문국밥’에서 일하고 있다.

?‘면스플레인: 면’과 설명하다를 뜻하는 ‘explain’의 합성어. 냉면은 반드시 어떻게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언행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박찬일(음식 칼럼니스트)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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