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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기획 · 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우리가 잘 몰랐던
한글 이야기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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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은 571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한글은 세계적 석학에게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는
극찬을 듣는 문자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의 한글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600년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자지만 정작 우리가 잘 모르는 한글 이야기를 꺼내본다.

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 몇 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이었으나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사가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반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전하가 지으셨다”는 문구가 있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만든 후 집현전 학사 몇 명에게 한글을 연구하게 했다. 백성이 새로운 문자를 쉽게 쓸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한글이 아닌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은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1446년에 만든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다. 연산군이 자신을 탄핵하는 한글 벽서에 분노해 전국에 있는 한글 책자를 모두 불태운 탓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보호에 큰 업적을 남긴 간송 전형필은 이 소식을 듣고 제시 가격인 1,000원의 10배인 1만 원에 이를 구입한다. 당시 1,000원이면 큰 기와집 한 채 가격이었다. 때는 일본이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하던 시기. 간송은 “조선총독부에서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기와집 열 채 값도 아깝지 않았다”고 했다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한 간송은 이를 비밀리에 지켜오다가 해방 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불러 한글 연구를 위한 영인본을 만들었다. 비로소 한글의 창제 원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 하면서 또다시 위기가 닥친다. 간송은 다른 문화재는 다 놔두고 <훈민정음 해례본>만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피란길에 오른다.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고 자면서 이 책을 지켰다고 한다. 이렇듯 간송이 한순간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보호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문자를 만든 목적과 그 원리를 밝힌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별명도 많은 한글

세종대왕은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명명했으나 ‘정음’, ‘언문’, ‘언자’, ‘언서’, ‘국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언문은 백성이 쓰는 쉬운 글자라는 뜻으로 그 가치를 낮추어 부르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여자, 중인, 하층민, 아이들이 주로 쓴다 하여 ‘암클’, ‘중글’, ‘아랫글’, ‘아햇글’ 등으로 속되이 불리기도 했다. 훈민정음이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문법의 뼈대를 세운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지은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큰 글’이라는 뜻 을 담았다.

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된, 제1회 가갸날 잔치 전경

최초의 한글날은 11월 4일, 이름은 ‘가갸날’

10월 9일은 한글날! 하지만 처음부터 10월 9일이 한글날은 아니었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훈민정음 반포 시기를 기준 삼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고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1928년에는 가갸날이 ‘한글날’로 바뀌었고, 1931년부터 양력 날짜로 환산한 10월 29일에 한글날을 기념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반포일이 9월 상한(上澣)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했다. 이름도 한글날로 바뀌었다. 그럼 북한에도 한글날이 있을까? 북한에는 한글날이 없다. 한글의 ‘한’이 대한민국의 ‘한(韓)’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글 대신 ‘훈민정음’ 또는 ‘조선글’이라고 부른다. 한글날 역시 ‘훈민정음 창제일’이나 ‘조선글날’이라 부르고 날짜도 훈민정음 창제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월 15일로 정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한 외국인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세계 지리를 가르친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세계 여러 나라 문자와 비교해봤지만 한글과 견줄 문자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회고록에 밝힐 정도로 한글을 사랑한 그는 AP통신과 〈타임〉 등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사를 여러 차례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에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영국인 목사 존 로스는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외국인을 위한 한글 교재 를 지으면서 영어 단어에 맞춰 띄어쓰기와 가로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된 띄어쓰기로 보기 어렵고, 본격적으로 띄어쓰기가 이루어진 것은 ‘독립신문’이 발간되면서부터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띄어쓰기를 공식적으로 규정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국 목사 존 로스는 <조선어 첫걸음>에서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했다.

한 자 한 자 마음이 담긴 정조의 편지

한글 창제 이후, 그동안 한자를 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던 백성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일상을 글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하소연하는 상언(上言)도 가능했고, 임금은 모든 백성이 다 읽을 수 있도록 교지를 한글로 내리기도 했다. 유언장과 노비 문서, 족보 같은 다양한 한글 고문서가 발견되어 한글이 각계각층을 망라한 많은 사람에게 일상적 의사소통 도구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언간, 즉 한글 편지는 문학성과 정보 교류라는 실용성을 함께 갖추어 한글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부인이나 딸과 소통할 때는 한글을 주로 썼다. 그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한글 편지나 교지를 내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신하와 친인척들에게 비밀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중에도 한글 편지가 있었다. 국립한글박물관에는 정조가 4세부터 46세까지 쓴 한글 편지가 전시되어 있는데, 4세 무렵에 큰외숙모 여흥 민 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작은 버선을 사촌 동생 ‘수대’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조가 4세(아래), 42세(위)에 큰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 정조는 한글로 많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한글 첫걸음>과 <바둑이와 철수>

침략 세력이 물러나고 첫 한글 교재로 선보인 <한글 첫걸음>은 그 자체가 우리말과 글이 되살아난 것을 의미했다. 광복 후 초·중등 과정용 국어 교과용 도서로 발간한 <한글 첫걸음>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초·중등 과정 수준의 ‘한글 익힘 책’으로 보급되었다. 정부 수립까지 200만 부 넘게 발행, 보급된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정부 수립 후 발행한 <바둑이와 철수(국어·1-1)>는 한글 자모 익히기에 중점을 둔 <한글 첫걸음>과 달리 처음부터 문장으로 꾸민 초등학교 ‘문장법(문장식) 교과서’로 편찬되었다. 즉 문장 속 단어를 하나씩 숙지해나가는 방식을 채택해 편찬한 책이다. 요컨대 문자 교육에서 언어 교육으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우리말과 글의 부활을 알린 <한글 첫걸음>과 첫 문장식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

민족운동으로 펼친 국학 운동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글이 비로소 한자를 밀어내고 국문 자격을 얻는다. 훈민정음 창제 후 45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한글은 모진 수난을 겪게 된다. 일제는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완전 폐지하고,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언론 매체를 없애버렸다. 하지만 국학 운동은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 항일 독립운동과 함께 꾸준히 추진되었다. 1908년 장지연, 이윤재, 최현배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는 한글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법통일안’, <조선말큰사전>을 만드는 등 우리말 연구와 정리, 보급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학회와 관련 인사들을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구속했다. 이때 체포된 인사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그중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고, 11명은 실형을 언도받았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1942년)이라고 한다. 이후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말큰사전> 원고를 전부 분실했다가 광복 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찾아 <조선말큰사전> 전 6권을 1957년 10월 9일에 완간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생존자들이 모여서 찍은 사진(1946년)

한글 그 자체로 예술

한글은 특유의 조형미와 예술성으로 말을 옮겨 적는 고유의 문자 기능을 넘어 다방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전자출판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한글 글꼴을 통해 개인의 다양한 감성을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린 독특한 분위기의 글꼴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손글씨(캘리그래피)를 통해 아름다운 서체와 결합하면서 감성까지 전달하는 창의적 언어로 재탄생하고 있다. 또 건축, 의상, 생활용품 같은 디자인 분야와도 자유롭게 결합하는데, 이는 한글 자모가 형상이 단순하면서도 현대적 조형미를 고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 미술이나 무용을 비롯한 각종 예술 분야에서도 한글을 활용한 전시나 공연을 기획하는 등 한글이 지닌 가능성이 날로 부각되고 있다. 한글은 하나의 문자로 출발하여 거대한 한글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한글은 특유의 조형미와 예술성으로 다양한 서체는 물론 디자인, 건축, 의상, 미술, 무용 등 각종 분야에서 창의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한글날, 아이와 함께 가볼 만한 명소

한글가온길

‘한글가온길’이란 한글 탄생지인 경복궁, 한글을 지켜온 한글학회와 주시경 선생의 집터가 있는 곳으로 한글의 역사와 관련한 숨은 이야기가 가득한 한글의 중심지다. 새문안로3길과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난 세종대로23길을 이르는 말이다(‘가온’은 ‘중심’, ‘가운데’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특히 ‘한글숨바꼭질’이라는 이름 아래 한글을 주제로 디자인한 18점의 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위치
종로구 세종로(금호아트홀과 경복궁 역 사이 길, 광화문역 8번 출구 부터 시작)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글 관련 자료와 전시물을 이용해 흥미롭게 꾸몄으며, 세종대왕의 업적을 현대미술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한 한글놀이터와 외국인을 위한 한글배움터도 마련했다.

위치
용산구 서빙고로 139
문의문의
02-2124-6200, www.hangeul.go.kr

광화문 세종대로

광화문 광장에 세운 세종대왕 동상 앞에는 당시 발명한 앙부일구, 측우기, 혼천의가 있다. 세종대왕이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동상 뒤쪽 지하에는 ‘세종이야기’라는 전시실이 있다. 광화문역 지하에 마련한 ‘세종이야기’는 인간 세종과 그의 민본 사상, 한글 창제 등을 정리한 전시 공간과 행사 마당, 영상관, 기념품 가게 등을 갖추었다.

위치
종로구 세종대로 지하 175(세종로)
문의문의
02-399-1114-6, www.sejongstory.or.kr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다시, 바라보다’ 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에 관련된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난중일기, 충무공 장검 등이 주요 전시작품이며, 이외에도 정병규, 빠키 등 현대 미술가들이 훈민정음과 난중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설치, 영상, 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오는 10월 12일까지 열린다.

위치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문의문의
02-2153-0000, www.ddp.or.kr

이정은 사진 홍하얀일러스트조성흠
자료 제공국립한글박물관,간송미술문화재단 참고 자료<역사가 숨어 있는 한글가온길 한 바퀴> (김슬옹, 해와나무), <다 알지만 잘 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 (배유안 외, 책과함께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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