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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고, 와트는 증기기관을 개량하다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고, 와트는 증기기관을 개량하다>
2017.07

문화

역사 속 평행이론

영·정조 르네상스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고, 와트는 증기기관을 개량하다

서울

조선, 영·정조 르네상스를 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한양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쟁 와중에 불타버린 궁궐 등을 다시 지어야 했다. 이와 함께 청계천 바닥을 파내는 준설 작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조성한 청계천은 3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전쟁 이후 전국에서 발생한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들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개천 주변 밭에 채소를 경작하면서 수로가 막혀 물 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더욱이 폭설과 강추위 등 기상이변이 이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늘어난 한양의 백성들이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었고, 민둥산이 되어버린 도성 주변의 산들은 비가 조금만 와도 막대한 토사가 쓸려 내려와 청계천을 메워버리곤 했다. 그런 탓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하천 바닥이 평지와 비슷한 높이가 되어 청계천은 하천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대규모 준설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21세기 서울의 청계천 복원도 여러 해가 걸린 대규모 공사였지만, 18세기 한양의 청계천 준설은 당시로선 ‘국가 사업’이라 할 만큼 어렵고 규모가 큰 공사였다. 영조는 먼저 여러 차례에 걸쳐 청계천 준설에 대한 민심을 청취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준설 공사를 책임질 기관으로 준천사를 설치했다. 다시 몇 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대역사를 시작해 57일 만에 개천에 두껍게 쌓인 토사를 제거하고 청계천의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못다 한 공사는 10여 년이 지난 1773년에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덕분에 한양은 전쟁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 동시에 ‘영·정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중흥기를 맞을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서양 근대사의 포문

한양이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세계는 글자 그대로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1765년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기존 증기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증기기관을 완성한 데 이어, 3년 후에는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발명함으로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요즘 떠들썩한 ‘제4차 산업혁명’의 증조할아버지뻘쯤 되는 제1차 산업혁명이 영조의 청계천 준설 기간 동안 벌어진 것이다. 경제적 변화는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졌다. 영조가 두 번째로 청계천 준설 공사를 벌인 1773년, 태평양 건너 미국 보스턴에서는 영국의 지나친 세금에 반발해 배에 실려 있던 영국 홍차 상자를 바다로 던져버린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격분한 영국은 이듬해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으나 미국의 저항은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선포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서양의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구완회(작가)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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