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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탐방 · 서울의 오래된 것들
도로 위의 건물
'낙원상가'
2015.9

요즘은 1층을 기둥만 남겨둔 채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례가적지 않아 낯설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공간에 자동차 도로가150미터 넘도록 이어지고 꺾여 있는데다 심지어 가운데에는 교차로까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치 도로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건축물은 서울 한복판 종로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삼일로 위에 있다. 바로 낙원상가다.

아래내용 참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 글씨의 빌딩 입구 간판이 정감있다. 6층부터 15층은 중정이 있는 복도형 아파트 2-3층 악기상가, 4-5층은 창고와 사무실, 합주실 지하에는 재래시장 극장(한때는 극장 앞에 당구장과 볼링장, 카바레가 유명했다고 한다.) 1층은 왕복 4차선 도로와 주차장 낙원상가 자체가 꺾인 형태인지라 아파트가 삐딱하게 들어선 듯 보인다. 북촌에서 바라본 모습이라 극장과 영화광고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관리사무소 윤식 씨가 낙원상가의 기둥에서 타공하면서 나온 철근콘크리트 타설 부재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한강의 모래와 자갈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니!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튼튼해 보였는데 그 자체로 예술장식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번은 커다란 트럭이 건물 1층 도로를 지나다 기둥을 들이받은 적이 있어 놀라 내려갔는데 차는 크게 파손되었지만 기둥은 칠만 벗겨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절단된 철근의 모습도 보이는데 방금 만든 것처럼 날카로운 은빛이 인상적이다.



낙원상가 건물은 1967년 완공되었다. 도로 위에 건물을 짓는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어떻게 나왔나 싶지만, 알고 보면 건물을만들면서 도로도 닦인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이곳에는 재래시장 골목이 있었다고 한다. 무허가건물들과 노점들이 무질서하게혼재되어 있던 곳에 도로를 놓으려 했던 서울시의 도시계획은 살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상인들의 반발도 컸을 뿐 아니라 재정도만만치 않았다. 결국 묘안으로 나온 대책이 재래시장을 지하상가로 넣고, 도로를 뚫은 뒤 그 위에 상가와 아파트를 세우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도로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위법이었지만 재개발을 위한 특별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생각도못할 일이다. 말 그대로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는이야기가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낙원상가는 세운상가와 함께 주상복합건물의 1세대로 통했다. 도심 복판의 주거공간은 새로운 인기를 누렸고,이는 성공으로 치부되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상업지구가 활성화되면서 상부에 위치한 아파트의 주거환경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입주자들을 몰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운상가의 경우로국한되었고, 낙원상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현재까지도 주상복합의 용도가 건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건물 내부적으로 성공적인 통제와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보적인 악기상가라는 차별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아래내용 참조

사무실동의 옛 엘레베이터. 속도도 정말 느리다. 처음 상태 그대로인데 디자인이나 색감이 무척 매력적이다. 나무로 두툼하게 깎아 만든 층별 표시판 스위스의 쉰들러 엘레베이터의 로고가 선명하다. 문에 있는 발은 에어컨이 없던 옛 시절의 잔재인데, 아직도 떼어내지 않고 깔끔하게 칠을 하여 남겨 놓은 사무실들이 있어 흥미롭다. 수직 회전식 나무창틀도 예스럽다. 아파트의 뻥 뚫린 중점에는 투명한 지붕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환한 깊이감을 만들어준다. 벽에 새겨진 부조도 은근히 마음에 든다. 반대쪽에도 아기를 안은 엄마가 비슷한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악기상점가는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이는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몰려들던 종로와 인사동의번화함 때문이었다. 이런 여흥문화는 강남이 개발되기 전 밴드가 활동하는 유흥업소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연주자들의 모임장소로 활용되며 활성화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악기를 사고팔거나 일자리를 찾았다. 이때만 해도 낙원상가가 악기만 팔던 전문상가는 아니었다. 양품, 잡화점을 비롯해가구점도 많았다고 하는데 1979년 탑골공원 주변을 둘러싸던 상가들이 철거되면서, 일부 악기점이 낙원상가로 입주하면서 본격적인 악기시장이 형성되어 갔다.

때마침 통행금지도 해제되면서심야영업이 늘어났고, 악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하며 악기시장도 호황을 누렸다. 이에 맞춰 낙원상가에서도 아예 악기상점 위주로 재편했다. 일반 피아노를 사다 비싼 피아노의 마크를 바꿔 붙이다 걸려 쫓겨난 가게도 있었고, CCTV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좀도둑과의 실랑이도 많았다. 오랫동안 주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지라 주변 밀집상가에서 불이 나면 호스로 물을 뿌려 화재를 진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져온 악기시장의 모습이 오늘날을 만들었다. 비록 악기의 수요는 예전같지 않다지만그 차별성만으로 희망이 존재하는 곳이다.

아래내용 참조

중고 악기를 샀다. 누군가가 버린 꿈이 이토록 싸다니... 문득 어느 라디오에서 들었던 멘트가 생각났다 -'블루노트' 중에서 1층 도로의 교차로.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그래도 보행측면에는 계속해서 환한 조명을 신설하는 분위기다. 앞으로서울에도 대심도 터널을 뚫고 교차로까지 만들 계획이라는데 대략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든 시행착오라 할지라도 이런 다양한 특색들이 남은 서울이 나는 좋다. 반듯하게 쭉쭉 뻗어나간 강남이나 신도시는 그래서 심심하고 역사와 이야기가 없는 도심이 되고 만다.



오래간만에 낙원상가를 찾았다. 내게 악기란 쉬운 코드 몇 개로밤새 노래를 부르던 통기타에 대한 기억뿐인지라 이곳에 올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종로에서도 보이는 도로 위의 영화 간판은 종종 허리우드 극장으로 나의 발걸음을 이끌기도 했다. 이제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실버영화관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예술영화와 뮤지컬 무대도 갖고 있는 문화공간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반갑다. 나는 극장홀의 대기실에서 많은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 잠깐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 한분 없이 모두 할아버지들뿐이다. 이 시대의 할머니들은 모두 어디 계신 걸까.

지하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점심으로 국수를 한 그릇 사먹고, 다시금 올라와 악기상가를 거닐었다. 악기란 물건의 모양과 색깔은 언제 보아도 멋있다. 이 물건들이 그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피아노가게에 다다랐다. 한 사람이 많은 피아노들 사이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복도 한구석에 서서 가만히 그림을 그리며 피아노 음악에 푹 빠져들었다. 음악은 감미로웠고, 실수나 떨림도 없었다. 연주를 끝내고 일어서자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아노를 구입하기 위한 테스트 연주였던 걸까. 짧은 곡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몇 마디를 나누더니 그가 다시 앉는다. 순간 어떤 기대감. 잠시 침묵. 그리고 이내 다음곡이 시작된다. 무엇인가에 대한 옛 기억이 가느다랗게 선을 이어간다. 서울에 남아 있는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소리, 다양한 모습들이 다양한 기억이 되어 남는다.

아래내용 참조

서울시 미래유산 홈페이지 futrueheritage.seoul.go.kr  서울시는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남길 만한 소중한 근현대 서울의 문화와 유산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해 지원 합니다. <서울의 오래된 것들> 칼럼은 서울시 선정 미래유산을 중심으로 꾸며집니다. 이장희 다양한 매체에 글과 그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 이야기>가 있다. 지난 연재 순서 1. 성우이용원 2. 동헌팔방 3. 수도약국 4. 종로양복점 5. 중앙탕 6. 낙원떡집 7. 무교동 북어국집 8. 공씨책방 9. 불광대장간 10. 서울기상관측소 11. 윤극영 가옥 12.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13. 서울YMCA 14. 이문설렁탕 15. 송림수제화 16. 금성부동산 17. 일광세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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