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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서울 골목길 산책
창신동 봉제사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의류 산업
2013.9

“흰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샤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

‘사계’ 가사처럼 소금땀이 흐르던 8월 어느 한낮, 창신동 봉제 골목을 찾았습니다. “드륵, 드륵,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더군요. 자동차 한 대 겨우 드나들 만큼 좁고, 하이힐을 신고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길을 따라 작은 봉제 공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공장이라고 하기도 그런, 빌라를 개조한 비좁고 낡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 이곳에서 우리의 수많은 누나들이 소위 말하는 ‘시다’가 되어 옷을 만들었고, 그들의 땀과 눈물, 의지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창신동은 ‘진행 중’입니다. 동대문시장에서 판매하는 많은 옷을 이곳에서 만들고 있거든요. 라벨에 ‘MADE IN KOREA’라 쓰여 있지만 ‘MADE IN 창신동’이라 읽어도 되지 않을까요? 재봉틀 소리, 오토바이 소리 요란한 창신동 봉제 골목으로 떠나봅니다.



‘○○ 미싱사 ○번 시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어나?’ 싶을 정도로 낡고 오래된 동네. 전형적인 달동네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지만, 실제로는 화려한 동대문시장을 움직이는 배후 기지가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이 예전부터 이렇게 낙후한 곳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마을 전체에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를 심어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의 ‘홍숫골’ 혹은 ‘홍수동(紅樹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관이 수려하고 도성과 가까워 양반의 별장이 많이 있었다. 한성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에 속해 있었는데, 가운데 글자를 따서 현재의 이름이 됐다고 한다.

“40년 전만 해도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참 많았어요. 시골에서 엄마 손잡고 창신동으로 왔는데, 우리 집은 그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다 지나고 있는 땅에 딱 붙은 집인거라. 공동 화장실에 공동 우물을 사용해야 하는 그런 집이었지요.”
30년 동안 창신동에서 봉제 일을 하고 있는 김종임 씨는 비록 기와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울이라 좋았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창신동이 서민 동네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현재 절개지라고 부르는 곳에서 돌을 캐내 경성역, 조선총독부 등을 지었다. 채석으로 인해 망가진 동네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창신동이 봉제 공장 타운이 된 것은 1970년대 평화시장 땅값이 급상승하면서 그곳에 있던 봉제 공장들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다. 한때 2만7천여 명에 달하는 평화시장 봉제 공장 노동자들이 동대문시장 건너편 창신동으로 들어와 봉제 공장 하청 노동자가 됐다. 당시 800여 개의 의료 제조업체에서 1만5천 명이 일했고, 하루 14시간 노동에 월급은 9천 원이었다.

“배고프고 힘들어도 다들 여기서 일하려고 했어요. 기술을 배울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기는 남자 미싱사도 많아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이름도 몰라. ‘○○ 미싱사’, ‘○번 시다’로 불렀어요. 그때 고생하며 미싱 배운 사람들이 지금 봉제 공장 주인들이지.”
30년째 이발소를 운영하는 시온이발소 이명남 씨는 “‘시다’ 출신들이 지금은 여엿한 사장님이 됐다”며 아직도 70% 이상 미싱을 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현재 창신동에는 3천여 개의 봉제 공장이 있다. 다세대주택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간판도 없이 2~3명이 일하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많지만, 모두 봉제의 달인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옷 한 벌을 뚝딱 만든다. 아침에 동대문시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패턴, 재단, 미싱 공정을 거쳐 주름 잡기, ‘와끼’ 작업, ‘구찌’ 작업 등이 이루어진다. 와끼는 모든 솔기를 말아 박는 작업이고, 구찌는 바지의 속주머니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일차 가공한 옷은 ‘시아게’ 작업장으로 보내 다림질, 단추 달기 등 마무리 손질을 거쳐 새벽에 동대문 도매시장에 납품한다. 예전에는 한 공장에서 이 일을 다 했는데, 요즘에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각기 다른 공장에서 한다. 그래서 창신시장 길을 따라 시장 쪽으로는 부자재, 패턴 작업장, 종합 공장 등 큰 규모의 공장이 포진해 있고, 동부여성문화센터 위쪽으로는 와끼, 구찌 등 한 가지 공정만 담당하는 작은 공장이 있다.

“창신동은 아침에 미싱 소리로 시작해서 새벽에 오토바이 소리로 끝나는 곳이에요. 아침부터 밤 9시까지 미싱을 돌려 옷을 만들면 새벽 2~3시까지 ‘시아게’ 작업을 하지요. 옷이 완성되면 오토바이가 동대문시장으로 배달을 가요. 그러니 하루 24시간이 시끌시끌하지.”
임만국 씨(소문난 곱창집 주인)는 그 활기에 창신동을 떠나지 못하고 2대째 곱창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개발 연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킨 수출산업 역군이자 가난한 집안의 기둥이던 누나·형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된 지금, 창신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창신동 일대가 뉴타운지구에서 해제되면서 봉제 박물관 등 창신동 일대가 관광명소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5월 30일부터 7월 2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창신동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철거할 당시 쪽방촌과 봉제 골목의 모습 일부를 집 재료까지 그대로 옮겨 와 전시했는데, 박물관 전시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창신동 마을 투어를 연계 진행해 호평을 받았다. 청년 사회적 기업 ‘러닝투런’이 ‘도시의 산책자’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마을 해설사 혹은 음성 안내기의 안내를 받으며 창신동 봉제 골목을 여행할 수 있도록 한 것.

러닝투런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창신동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예술 교육을 진행하던 신윤재·홍성재 씨가 의기투합해 만든 예술가 집단으로, 최근에는 지역 봉제 공장과 협력해 원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부분을 최소화해서 만든 ‘제로웨이스트 셔츠’를 개발했다.
창신동에서는 러닝투런 외에도 주민 소통의 장인 라디오 방송국 ‘덤’, 지역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커뮤니티 공간 ‘뭐든지 도서관’ 등 마을 공동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봉제 공장 사이에 예술 공간이?


‘도시의 산책자’ 프로그램을 따라 창신동 골목을 산책해본다. 시작은 낙산삼거리 아래에 위치한 러닝투런의 문화 예술 공간 ‘000간2’다. ‘000간’은 비어 있으면서 다른 이름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의미의 ‘0(공)’과 사이 또는 틈이란 뜻의 ‘간’을 합한 것으로 ‘000간1’, ‘000간2’가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뭐든지 도서관’에서 1천 원짜리 아이스커피를 사 들고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오며 봉제 공장들을 구경한다. 어둡고 좁고 더운 열악한 환경이라 대놓고 구경하기가2016-05-13 미안해 흘낏흘낏 곁눈질로 훔쳐본다. 효성약국에서 좌회전해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면 시온이발소가 나온다. 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주인 이명남 씨가 없다.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단다. “가져갈 것도 하나 없는데, 뭐하러 문을 잠가요. 덥기만 하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명남 씨는 이·미용 봉사를 많이 해 고건 서울시장 때 봉사 활동상을 받기도 한 이 동네 유명인이다.

시온이발소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눈앞에 절벽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던 절개지다. 절개지 위로 올라가니 낙산 서울성곽이 정면으로 보인다. 조선 순조 때부터 점술가들이 모여 살다가 일제가 채석한다고 낙산의 바위를 깨뜨리자 점괘가 나오지 않는다며 미아리로 떠났다는 당고개를 지나 한계령 축소판인 회오리길을 내려오면 실, 심지, 초크, 지퍼 등 재단과 봉제에 쓰는 다양한 부자재를 파는 홍표실집이 나온다. 재단사와 봉제사들의 사랑방으로 늘 서너 명이 앉아 장기 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홍표실집 골목부터는 시끌시끌 복잡하다. 창신시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창신시장은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으로 매운 족발이 유명하다. 고단한 일 끝내고 술 한 잔 기울이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을터. 요즘은 창신동에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연변, 인도, 네팔 등 다양한 국적의 음식점이 생겨나고 있다.

갖가지 소문이 무성한 빈집 ‘미스터리 빈집’을 지나고 1889년 성월대사가 창건한 안양암을 지나면 철종이 영혜옹주 부부에게 내린 별장 터인 궁안이 나온다. 이쯤에서 창신동 산책을 마쳐도 좋지만 역사 탐험을 더 하고 싶다면 03번 마을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쪽으로 향한다. 궁안에서 낙산공원 사이에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인 청룡사와 세종 때 청빈한 정승이던 유관의 집을 복원한 비우당이 있다.
창신길 굽이굽이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시계가 멈춰버린 듯 발전하지 않은 서울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창신동. 하지만 그 속에서도 미싱은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다. 동대문시장의 어머니, 창신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글 이정은 사진 강민구 자료 협조 러닝투런 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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