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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대학로 101 서울대학교병원 의학 박물관 옛 사진

기획 · 아름다운 시절 ⑥
한국 의학의 중심
대한의원
2016.07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건축물과 장소를 소개합니다.
서울 시민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과 대화해보세요.

종합 의료 기관 대한의원 탄생

내 이름은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년에 개원한 대한제국의 근대식 국립 병원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개화기로, 1800년대 말부터 조선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고,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사회로 개혁해가고 있었다. 근대화 작업에는 의료 근대화도 포함되어 1885년 고종의 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 병원 제중원(濟衆院)을 세웠다. 개화를 통해 전에 없던 것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그와 더불어 일제의 외교 압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나라를 뒤흔든혼란 속에서도 개화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899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국립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를 세웠고, 1902년에는 부속병원을 설립해 국내 최초의 서양식 의사를 배출했다. 그리고 이들은 1907년, 나의 설립 계획과 함께 나의 일부가 되었다.

1908년 대한의원 개원식 기념 사진첩에 실린 3등 병실 모습.

2014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 대한의원 탑시계. 하루
두 차례(오전 11시, 오후 4시) 15명 내외의 인원에게 개방한다.

1907년 고종 황제는 의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자 국립병원인 광제원, 국립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황실에서 설립한 빈민 치료 기관인 대한국적십자병원을 통합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게 바로 나, 대한의원이었다. 나는 교육·진료·보건 행정 기능을 모두 갖춘 종합 의료 기관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차분하면서 고풍스러운 외용 때문에 일전에 이 칼럼에 소개된 한국은행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꼽혔다. 머리에 얹은 둥근 지붕과 정면에 위치한 시계탑은 17~18세기 유럽 네오-바로크풍으로, 내 자랑이기도 하다. 시계탑은 당시 임금이 백성의 시간을 관장하는 전통적 이념과 서구 의술을 도입해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한 뜻이 담겨있다. 탑시계는 자주 고장 나는 바람에 1981년 전자시계에 그역할을 넘겨주고 30년 넘게 꼭대기에 잠들어 있다가 2014년복원되어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기계식 대형 탑시계 덕분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탑을 품은 건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와 혼돈의 시간

아직까지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일제강점기는 계속 바뀐 내 이름과 소관 관리처가 말해주듯 내 지난날 중 가장 혼란 스럽게 성장을 반복한 시기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 이후 나는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다. 또 부속의학교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은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임상 실습을 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의원은 다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이름이 재편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독자적 부속의원을 소격동에 개원했다. 더불어 초대 원장이 일본인으로 바뀌며 나와 함께 일하는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으로 교체되었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경성의학전문학교 등 의학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학생은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졸업 후에도 고위 행정직이나 교수직에서 배제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이들은 차별 대우에 저항하고,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하는 등항일운동에 헌신했으며, 질병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위해 노력해 해방 후 한국 의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쓰인 ‘레지덴트 교육 계획서’.

플라시도 디스크(왼쪽)와 간이 수혈기. 플라시도 디스크는 각막의 두께값을 측정하고,
간이 수혈기는 인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데 쓰인다.

대한의원 건물(사적 제248호)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 역사를 선도하다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면서 의학부에 한국인 교수를 임명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의과대학이 되었다. 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해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세웠고, 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과 통합되어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으나, 다친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임무와 함께 의학이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폐허 속에서 빈 공간으로 버려졌다가 미국 의학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났다. 이때도 일본 의학에 이어 미국 의학의 뒤를 따라야 했지만, 나라를 재건하고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많은 이의 노력 덕분에 전쟁의 잔재를 지워나가며 점차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5년경부터 경제 발전으로 전문성을 획득한 의학자들과 함께독자적인 한국 의학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과 같이 세계적 수준의 한국 의학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1978년, 새로운 의료 기기와 진료 체계를 수용하고자 신관에 내 역할을 넘겨주어야 했다.
아픈 사람을 보듬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의원 역할은 끝났지만, 지금처럼 의학박물관으로 남아 내가 목도한 한국 의학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의학 발전의 거점 등 많은 역할을 해왔으나, 나는 나를 거쳐간 모든 이의 온기를 품은 장소로 남고 싶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영원히 담은 곳, 그리고 그 시간을 위한 곳으로 기억되고 싶다.

글 김승희 자료 제공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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