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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옛 사진

기획 · 아름다운 시절 ①
당신을 위한 기억들
단성사
2016.02

이번 호부터 서울의 오래된 건축물과 장소를 소개합니다.
서울 시민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과 대화해보세요.

1단성사의 초기 모습.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지어 전통 연희 공연장으로 출발했다. 출처: 연합뉴스
21940년 일본 잡지 <本日ンタモ(모던 일본)>(조선판)에 표지 모델로 등장한 당대 최고 여배우 문예봉. 출처: 어문학사
3,4<麻衣太子>(1956년) 포스터. 단성사 개봉. <多情도 病이련가>(1957년) 포스터. 단성사 개봉.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영화관으로 꿈을 키우다

안녕하세요, 단성사입니다. 아, 2015년 3월 19일 최종적으로 주인이 바뀌었으니 내 이름도 곧 기억에서 사라지겠지요. 그보다 먼저인 2013년, 영화관으로서 삶이 끝났기에 나를 모르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907년 종로3가 네거리에 국내 최초로 들어선 영화관입니다. 주승희, 안창묵, 이장선 세 친구가 나를 세상에 나오게 만들었는데, 판소리와 민요 등 전통 연희 공연장으로 걸음마를 시작했지요. 한데 곧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암울하던 시대 분위기와 반대로 나는 한국 예술의 요람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열세 살 되던 해에 한국 영화의 효시라 불리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면서 영화관으로서 꿈을 키웠고, 이후 대부(代父)나 마찬가지던 박승필과 영화 제작을 시작해 우리는 곧 최초의 한국인 제작 영화 <장화홍련전>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일제 치하에서 국민은 슬픔에 젖었지만 피 끓는 청춘이었기에 친구들의 슬픔을 달래주고자 나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해나갔습니다.

첫 번째 전성기 그리고 첫사랑

이때부터 나는 초기 한국 영화의 산실이라 불리며 첫 번째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926년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을 통해 조국을 잃은 설움을 대신할 수 있었고, 1935년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인 <춘향전>을 성공시키며 첫사랑 ‘문예봉’을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물아홉이니 요즘 어린 친구들과 비교하면 한참 늦은 나이에 사랑에 빠진 것이지요. 반면 그녀는 열아홉 살의 곱디고운 처녀였습니다. 열여섯에 데뷔해 3년 만에 최고 인기를 누린 ‘춘향이’ 문예봉은 동양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가느다란 눈썹과 눈매, 살포시 다문 얇은 입술 그리고 하얀 피부에 단아한 머리까지, 당시 미인으로 불리던 조건을 다 갖추었으니까요. 지금의 여성상과 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물론 그녀 옆에는 임선규라는 친구가 지키고 있었지만, 그녀의 연기와 성공 덕분에 나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니 우리는 좋은 동료로 서로를 아꼈다고 생각합니다.

화양연화

30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나는 조선극장, 우미관이란 친구들과 함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자리 잡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황금관, 희락관, 대정관이라는 영화관과 맞서 나갔습니다. 혼돈스러운 시간과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은 점점 문화적으로 성장해나갔고, 이와 함께 무서울 것 없이 질주하던 내게도 라이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퇴계로에 사는 대한극장, 충무로를 지키던 명보극장과 스카라, 을지로에는 국도극장이란 녀석이 커져갔고, 옆으로는 세기 극장(지금의 서울극장), 피카디리 두 친구가 내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이 친구들 때문에 입지가 줄어들어 자신감이 사라질 때도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종로시대’를 부활시키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영화로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영화 한 편 보는것 외엔 달리 문화생활이 없던 그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 뿌듯하기도 했고요. 지금같이 도처에 영화관이 있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와는 많이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때의 풍경,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 서서 기다리던 모습이 정겹고 그립기만 합니다.

청춘의 거리, 종로블루스

이제는 비록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스스로 생각해도 가장 멋져 보이던 ‘종로시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할까 합니다. 어느 시대나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1960~1970년대의 청춘들이 좋았습니다. 그간 본 적 없던 청바지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통기타를 둘러멘 채 나를 찾는 친구들이 있던 1970년대는 파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청년들이 있었기에 종로는 변화와 문화의 거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맨발의 청춘>처럼 그들은 맨몸으로 전후를 버텨내며 격동의 시대정신을 표현했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폐허 속에서 자라야 했고, 당시까지도 남은 전쟁의 어두운 흔적 속에서 가난을 헤쳐나갔습니다. 덕분에 1970년대 청년들은 전쟁의 그림자를 지우고 희망을 노래하는 새로운 문화를 써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1960~1970년대 청년들이 겪은 애환은 나라 전체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부모님이 “요즘 것들은”이란 푸념과 잔소리를 하더라도, “그땐 그랬지”라고 옛 시절을 반복해 읊조려도 조금만 이해하기 바랍니다.

51962년, 현재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던 국제극장 모습. 1957년 문을 열어 1987년 문을 닫을 때까지 27년간 830여 편을 상영했다. 출처: <국제극장전경 2> 국가기록원, 관리 번호 CET0066478
6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인이 ‘황금관’이란 이름으로 세운 국도극장. 1946년 신축 개관하면서 ‘국도극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1999년 건물을 허물고 호텔을 세우기 위해 폐관했다. 영화 <證言>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출처: 국가기록원, 관리 번호 CET0050315
71964년에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맨발의 靑春> 포스터. 당시 청춘 스타이던 영화배우 강신성일과 엄앵란을 부부로 맺어준 영화기도 하다.

돌아오지 못할 날들

1990년대부터 서울 곳곳에 멀티플렉스 극장이란 친구들이생겨나더니 나를 비롯해 서울 영화판을 지키던 전통적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멀티플렉스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쉽게 볼 수 있어 암표 장수에게 웃돈을 주지 않고도 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화 1번지’라 불리던 내 고향 종로까지 멀티플렉스 바람이 불었고, 나 또한 2001년에 멀티플렉스 외형을 갖춰 다시 태어났습니다. 내게도 제2의 청춘이 시작되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현실은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도처에 영화관이 생기자 사람들은 굳이 복잡한 종로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고, 치솟는 땅값에 비해 내 값어치와 명성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 100여 년의 세월을 버틴 나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옛것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만 변해가는 세태가 야속한 것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1, 2, 3 <배뱅이굿>(1957년)과 시나리오. <방아타령>(1960년) 시나리오. 단성사 상영. <황무지>(1960년대) 시나리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4 2008년 부도 처리된 후 여러 차례 인수·합병을 거쳐 2011년 아산엠 단성사가 된 모습. 갖은 노력에도 재건에 실패한 단성사는 2012년 경매시장에 올라와 3년 만인 2015년에 최종 낙찰되었다. 출처: 연합뉴스 청춘의 기억에만 머무른 내가 야속한 것일까요? 나를 찾아 몇 시간이고 기다리며 영화를 보던 청년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요?

영원히 아름다운 시절

이제 서울 중심부를 주름잡던 영화 거리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 자리엔 거대하고 멋없는 건물이 들어섰고, 나를 버티게 하던 서울 시민의 추억도 묻혀버렸습니다. 사실 종로의 영화 거리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어느 극장에서 몇 시에 상영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긴 줄을 기다려 표를 사는 설렘과 낭만의 추억, 영화를 본 뒤 극장 주변에 성행하던 작은 주점에 삼삼오오 모여열띤 토론을 벌이던 청춘도 떠났습니다. 대신 노포(老鋪) 몇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인가요? 혹은 나이를 먹고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내 동료들은 쓸쓸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활기 넘치고 빠르게 달려가던 청춘들을 좋아하던 나였기에, 우리의 시대가 끝났다 하여 과연 그들과 시대의 변화 속도를 지탄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나는 비록 사라지고, 나를 기억하는 이도 언젠가 찾아볼 수 없겠지만
서울 시민과 희로애락의 100년을 함께하며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종로의 영화관을 거쳐간 작품들이 오래 남아 찬란하던 1900년대를 추억해주길….
나의 작은 소망입니다. 아름다운 시절, 단성사였습니다 

  

1,2,3<배뱅이굿>(1957년)과 시나리오. <방아타령>(1960년) 시나리오. 단성사 상영. <황무지>(1960년대) 시나리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42008년 부도 처리된 후 여러 차례 인수·합병을 거쳐 2011년 아산엠 단성사가 된 모습. 갖은 노력에도 재건에 실패한 단성사는 2012년 경매시장에  올라와 3년 만인 2015년에 최종 낙찰되었다. 출처: 연합뉴스



글 김승희 자료 제공 연합뉴스, 어문학사,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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