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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과 평화를 찾아 '서울의 종교 건축물'

안식과 평화를 찾아 '서울의 종교 건축물'>
2015.11

문화

서울의 오래된 것들

안식과 평화를 찾아 '서울의 종교 건축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우리나라에는 현재 많은 종교와 그에 따른 고유한 개성의 종교 건축물들이 있다. 토속 종교인 불교의 건축물 사찰은 서울의 산을 오르다가도 볼 수 있지만, 도심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근래에 들어온 천주교나 기독교 예배당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대표적인 이 세 종교의 건축물 풍경을 담았다.

돈암동 성당

견고한 성을 떠올리게 하는 고딕 양식이다. 외벽과 종탑 모두 화강암의 거친 표면을 살려 볼륨감을 강조한 러스티케이션 수법이 사용되었다.


예전에 이 자리에는 거대한 화강암 십자가가 있었는데 2000년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처음의 성과 같은 특징이 사라진 듯하여 아쉬움이 없지 않다. 당시 종탑에서 종소리를 울리면 안암동 산동네까지 들릴 정도로 멀리 퍼져 나갔다고 한다. 돈암동성당이 있던 돈암동, 삼선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장과 인그에 초가집 몇 채가 정부였고, 고개 너머 미아리에는 공동묘지만 황량하게 펼쳐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목장 규모가 엄처안게 커서 이곳 주민은 물론 많은 한국인들까지 이 목장에서 일을 했다. 공교롭게도 목장 주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명동성당 경내에 일본 26위 성인을 위한 성당 건축을 봉헌했던 장본인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 건물은 남아 성바오로수녀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돈암동 성당

1785년 이 땅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 1882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천주교인들은 많은 박해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성당’이라 부를 만한 천주교회의 건물 모습은 애초부터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그저 일반 집에 몰래 모여 미사만 드리는 정도였다. 1892년에야 비로소 우리 나라에 최초의 성당 건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중림동에 세워진 약현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당은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후 속속 건축된 성당 형태는 주로 벽돌을 사용했다. 이는 담당 교구 선교사들의 지역색이 반영된 것이 기도 했다. 여기에 조금 색깔을 달리해 전체적으로 화강암을 사용한 돈암동성 당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부터다. 이 시기는 교세의 급격한 팽창으로 성당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한 때다.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한국전쟁으로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팽배하던 시절로 전쟁이라는 비극적 체험이 많은 이들을 종교 안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천주 교회는 이에 발맞춰 많은 사회사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대부분의 신설 성당이 그러했듯 교구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형편이 못 됐다. 신자들도 가난해 자력으로 성전 건축을 세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들이 해방 후 국유화되었다가 싸게 불하를 받아 성당이 건립되기까 지의 모든 재정이 외국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당시의 이러한 도움은 돈암동 신자들에게 행운 그 자체였다.

돈암동에 성당이 생기기 전까지는 혜화동성당까지 걸어가 미사에 참례를 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개울이 많아 징검다리도 많았다는 기록도 보이니 주일 아침의 목가적인 풍경속 행렬이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준 성당은 당시 낮은 주택들 사이에서 더욱 웅장하고 경이롭게 돋보이며 신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을 것이다.

조각가 최종태 교소의 작품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성모마리아상이 인상적이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명동성당 입구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심성상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길상사 극락전 특이한 본당이다. 김영한 여사의 부탁대로 금당에는 석가모니 대신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만들었다. 아미타불은 내세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다. 아마도 중생들에게 염불을 통해 죽어 극락에 다시 태어나는 길을 제시해주고 싶었던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길상사 일주문 으리으리한 솟을대문의 일주문 역시 특이하다. 기존 절에서는 절대 만나볼 수 없는 일주문인데, 이뿐만 아니라 길상사에는 없는 것 또한 많다. 일주문을 지나 금당에 이르는 길에는 사천왕도, 인왕도 없다. 또한 극락전에는 단청이 없고, 아미타불 뒤 후불탱화는 색깔이 없는 먹탱화다. 여러 가지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편안한 절집인지도 모르겠다.

목이 긴 형태의 전형적인 정병이 아닌 납작한 모양이 이채롭다. 관세음보살이 들고 다니던 정병에는 감로수가 담겨 이어 모든 중생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주는 자비의 상징이 된다. 시무외(施無畏)인의 손 모양. 이는 불가에서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준다는 의미다.

관세음보살상 이곳에도 최종태 교수의 조각상이 있다! 법정스님의 권유로 만든 이 보살상은 그래서 수녀복을 입은 듯 묘한 느낌이다. 종교의 구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벗어낸 듯한 아름다움이 조화롭기만 하다.

길상사

우리나라에는 오래전 불교가 전해져 전국 곳곳에 많은 사찰이 있고, 이 사찰들은 저마다 탄생의 배경이 되는 소중한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천년 고찰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 있는가 하면, 국사(國師)를 지낸 덕망 높은 고승이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이야기를 담은 절도 있다. 어디 하나 각별한 사연을 담지 않은 절집이 있을까. 하지만 서울의 번화한 도심에서 멀지 않은 성북동에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그렇다고 스님이 직접 뜻을 갖고 창건한 것도 아닌 절집 같지 않은 절집이 하나 있다. 짧은 역사와 더불어 더없이 애틋한 창건의 사연을 담고 있는 이 절집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다.

길상사는 1995년 탄생한 젊은 사찰이다. 하지만 건축물까지 그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기존에 있던 것을 절집으로 바꾼 것인데 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물들은 무슨 용도였을까? 놀랍게도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국내 3대 요정(料亭) 으로 꼽혔던 대원각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을 받아 1,000억 원이 훨씬 넘는 재산을 선뜻 불교에 내놓은 것이다. 절 이름도 그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따왔다. 무엇보다 김영한 여사의 애틋한 사연은 젊은 시절 근대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더욱 깊고 아련해진다. ‘천재 시인’이라 일컬어졌던 백석의 시집은 우리 시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광복 뒤에 이어진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서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 월북 작가로 분류돼 한 때 우리에게는 금서의 시집이기도 했다.
몇 년간 열애를 나누었던 두 사람, 당시 만주로 함께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거절한 김영한은 결국 살아생전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불교에 시주하기에 이른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어느 기자가 고령의 할 머니가 된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그분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시를 쓸 거야.”

극락전 주변 바위에 걸터앉아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경내를 물든 가 을빛이 사랑스럽다.
그저 세상의 많은 변화들이 놀랍고 신비롭기만 하다.
요정에서 절집이 된 길상사처럼 의미 있는 변화가 또 있을까. 고요한 경내에는 멀리 삼각산 자락을 휘돌아 오르는 자동차의 간헐적인 엔진 소음만 아련하게 전해져 왔다. 요정을 가득 채웠을 소모적인 웃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 그 자리에는 극락전 금당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불의 엷은 미소만 남았을 뿐이다.

1958년 증축된 앞부분의 종탑으로 인해 2층 예배당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계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막힌 것을 비롯해 4개의 굴뚝이 없어지는 등 처음 모습의 특징이 많이 바뀌어 아쉽다.

1916년에 지은 강당식의 심플한 편면형 고딕 양식의 교회 건축물로 첨두아치(Pointed Arch) 등에서 우수한 벽돌 조적 디테일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석교교회

독립문 근처의 석교(石橋)교회가 위치한 천연동(天然洞)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던 천연지(天然池)라는 연못에서 유래했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도성의 화재를 대비해 조성한 인공연못이다. 각 성문 밖에 하나씩 위치했던 것으로 서쪽 연못에 해당된다. 못 한가득 연꽃이 만발해 그 아름다움에 반한 선비들이 연못가에 천연정과 청수관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 연못으로 흘러든 개울물은 금화산으로부터 발원되었다고 하는데 금화산은 높이에 비해 많은 약수가 솟아오르기로 특히 유명하다. 이제 그 산은 이웃한 안산에 속해 함께 일컬어지며 근처 금화터널이라는 명칭 속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어찌됐든 그 개울 돌다리 주변에 마을이 있어 석교동이라고 이름 붙었고,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오늘날 석교교회다. 기독교 중에서도 감리교인데 근처에 감리교신학대학교까지 있으니 교회의 위치가 지닌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석교교회의 역사는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한옥을 예배 당으로 개조해 사용했는데 5년 만에 신도 수가 100여 명에 육박해지자 더 큰 예배당 건립이 절실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소위 성 밖에 사는 주민들이 대부분 가난해서 헌금으로 거금의 건축비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운좋게 미국 교인들의 헌금이 모아져 마침내 1917년 새로운 벽돌 교회를 완공할 수 있었고, 증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 마당에 섰다. 주차장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와 향나무는 예전 이곳이 주차장 터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풍경이었을 개울이나 석교라는 이름을 만들어준 돌다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상상의 실마리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나는 좋다. 변해가는 서울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끄트머리를 이어나가며 장소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나는 과거 언젠가 시멘트에 덮여버린 개울을 따라 연꽃 만발했을 연못이 있었다는 금화초등학교를 향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가을 햇살이 나를 따랐다.



이장희
다양한 매체에 글과 그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서울의 시간 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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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일러스트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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