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미영 작가

인터뷰 · 탐방 · 서울 예술가

조각조각 이어 붙인 정겨운 동네

‘바느질 콜라주’ 제미영 작가

2017.05

제미영 작가의 작품은 조각보를 이용하기에
전통적이면서도 몬드리안의 회화처럼 모던한 감각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
독특한 기법으로 집과 동네를 그리는데, 어딘가 상당히 익숙하다.
삼청동, 북촌, 계동….
작가는 이 동네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얼핏 보고는 물감으로 그린 줄 알았다. 그런데 독특한 질감이 눈에 밟혀 다시 들여다보니, 한복 천을 오리고 붙였다. 가늘게 잘린 천은 날렵한 지붕 선이 됐고, 둥글게 오린 천은 막 피어난 꽃봉오리가 됐다. 뭐지, 이 색다른 기법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회의가 들었어요. '이게 진짜 내 그림 맞나? 외국의 그림들을 흉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래서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 동양화과에 편입해 다시 공부했죠. 그러자 비로소 길이 보이더군요. 서양화 기법을 가미한 작품을 그리면서 제법 재미나게 작업했어요."

그러다 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고향인 부산과 달리 서울에 오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 붓을 잡을 수 없는 답답한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다 우연히 그림을 그리고 남은 자투리 광목천에 눈길이 갔고, 그것을 한 조각 한 조각 꿰매나가기 시작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그렇게 며칠을 작업했을까? 원형의 큰 조각보가 탄생했다. 의도치 않게 완성된 조각보를 한참 들여다보다 가위를 들고 싹둑싹둑 잘랐다. 마치 신들린 듯이. 정신을 차려보니 조각보는 산산조각 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조각에서 지붕 선이 보이고 길이 보이고 나무가 보였다. 기다란 조각을 하나하나 선으로 이어 집을 만들고 길을 놓으니 동네가 완성됐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찌릿하면서 눈이 번쩍 뜨였어요. 바로 이거다, 바로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다!" 전통 조각보를 현대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제미영 작가의 바느질 콜라주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A Street Scene'(종로구 중앙고등학교 마을버스 길 모습), 한지에 실크, 바느질 콜라주, 90×162cm, 2012

≫ 제미영 작가의 집(家)과 꽃(花)에 깃든 소망

'가화(家花)- 집과 꽃에 깃든 소망'
캔버스에 아크릴· 바느질 콜라주·비즈, 130×195cm 2016
'2016년 단원미술제 선정 작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가화(家花)'
캔버스에 바느질 콜라주·비즈, 52.5×73cm, 2014

'가화(家花)'(종로구 계동 모습)
캔버스에 바느질 콜라주·비즈, 162×97cm, 2015

'소망꽃'
천에 바느질 콜라주·비즈, 90×54cm, 2014

이러저러한 우리의 삶처럼 소박하고 평범하게


초기에는 자른 조각보를 하나하나 선으로 이어 붙여 동네 풍경을 완성했다. 주로 삼청동과 통인동, 북촌, 인사동이 모델이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서울에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외롭고 힘들던 시절, 그녀는 이 동네에서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

"서울에도 고향 동네 풍경을 간직한 곳이 있더군요. 얼마나 반갑던지…. 인적이 드문 아침 시간에 삼청동, 북촌을 하염없이 돌아다녔죠. 작은 한옥들이 처마를 맞대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이 그렇게 정다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람이, 정이 그리웠나 봐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속 집 혹은 동네는 결코 웅장하지 않다. 이러저러한 우리의 삶처럼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하다. '조각조각 색깔 풍경'이라는 주제로 초기 작품을 선보인 후 제미영 작가는 해마다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더하며 더욱 풍성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길상'이라는 주제로 민화 속 꽃·종이배·종이학으로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고, '가화(家花)-집과 꽃에 깃든 소망'이라는 주제로 각박한 세상 속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담긴 삶의 희망과 소망을 표현했다.

"우리의 삶도 그리운 집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기대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제미영 작가

한국의 정체성을 현대미술과 접목


그리고 마침내 불안했던 긴 시간을 보상받듯 '2016년 단원미술제 선정 작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장 성백주 화백은 "전통과 현대적 미감의 조화로움을 선보인 조형 기법이 탁월하다. 한국적 정체성을 활용한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기대해볼 만하다"고 평했다.

그녀의 작업은 상당한 정성과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색색의 천을 맞대어 감침질로 꿰맨 조각보를 한지에 배접한 후 이것을 다시 조각조각 잘라내 새로운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구축과 해체 그리고 재구축을 반복하는, 꽤 지난한 작업이다. 그래도 큰 상을 받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늘 가득 채우려고 하던 공간에 여백을 두고 싶은 걸 보면 심적으로도 여유가 생긴 것 같고, 바느질과 가위질이 더욱 힘차졌다며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작품 속 집들과 꼭 닮았다. 겹겹이 들어선 정겨운 집들, 사람이든 집이든 사이가 좋지 않으면 붙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운 집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기대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림 속 풍경이고, 만들어진 꽃일지라도."

이정은 사진 홍하얀 작품 제공 제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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