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기획 · 아름다운 시절 ⑩

마음을 보는 곳

심우장(尋牛莊)

2016.12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것들을 소개합니다.
서울 시민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과 대화해보세요.

 

소 찾는 집

내 이름은 심우장(尋牛莊). 지어진 때는 1933년, 이름을 풀이하자면 ‘찾을 심(尋)’, ‘소 우(牛)’, ‘전장 장(莊)’으로 ‘소 찾는 집’이란 뜻입니다. 소 찾는 집이라 하니 외양간 이나 푸줏간을 떠올리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가택(家宅)으로 지은 한옥입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출한 한옥이지요. 왼쪽 끝 칸은 사랑방에 해당하고, 가운데 2칸은 안방, 오른쪽 끝 칸은 부엌에 해당합니다. 제 이름과 관련해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 좀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의 첫 주인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에게 들은 것인데, 불교에선 대개 소가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이기도 했습니다. 대승불교 승려인 그가 선종(禪宗)에서 행하는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尋牛)에서 내 이름을 따온 것이지요. 심우, ‘소를 찾는다’, 즉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만해 선생은 왜 내게 심우장이란 이름을 붙였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 충청남도홍성에서 출생해 14세에 첫 부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6세 때 <통감(通鑑)>을, 7세 때 <대학(大學)>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천재이던 그는 16세에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지만,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홀연히 사라져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범하고 기이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오세암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대표작 <님의 침묵>에 실린 시를 쓰곤 했다지요. 1908년에 하산한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방랑한 뒤, 불교의 뜻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특히 불교 타락을 비판하고, 다양한 불교 서적을 집필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그의 행적을 통해 내 이름이 지닌 뜻을 찾 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우장 입구.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만해 한용운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서 있다

심우장은 관람 시간 내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한용운 선생이 쓰던 방에는 친필 문서, 연구 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을 전시해놓았다.

매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다례재가 열린다.

독립을 향한 열망

만해 선생의 인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언서를 작성하는 데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다고 합니다. 특히 3·1 만세 운동 이후 다른 민족 대표들이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변절한 것과 달리, 그는 지조를 지켜 많은 청년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날에는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으며 “영접하는 사람이 아닌, 영접받는 사람이 돼라”라고 호통쳤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한옥이 대부분 남쪽을 향한 것과 달리, 저는 그늘이 드리운 북향 집입니다. 독립운동가이던 만해 선생은 남향으로 집터를 잡으면 당시 남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므로, 이를 피해 일부러 나를 북향으로 지었다고 합니다.그가 찾고자 한 마음, 진리 그리고 애국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나, 심우장이지요.

답을 구하는 곳, 심우장

1933년, 옥고를 겪은 후 외로이 지내던 만해 선생이 여기서 살기 시작한 것은 간호사로 근무하던 유 씨와 재혼한 뒤였습니다.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집터에 나를 짓고, 만해 선생이 거처하던 사랑채 밖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한 서예가 오세창 선생이 쓴 현판을 걸어두었습니다. 곧고 강직한 만해 선생을 따르는 이가 매우 많았기에 산 중턱에 자리한 집임에도 찾아오는 이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함께 활동한 문학인, 종교인과 독립운동가는 물론 연애 문제, 자식 문제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고민을 안고 와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지요. 비록 내 앞에 볕은 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연과 만해 선생의 혜안이 담긴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자그마한 마루가 따뜻한 햇빛으로 가득 찬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청렴결백한 그의 삶은 부인 유 씨와 외동딸 한영숙(韓英淑)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만해 선생의 뜻을 받들어 궁핍한 일상에도 불평 없이 삶을 꾸려나갔지요. 1944년 6월 29일, 중풍을 앓던 만해 선생은 조용히 내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춥고 작은 심우장을 큰 뜻으로 채워준 만해 선생의 빈자리는 실로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따님이 남아 나를 지켰고, 아버지를 닮은 그는 건너편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서자 나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만해 선생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남아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지요.

아래 내용 참조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씨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만해 선생이 나에 대해 남긴 시조입니다. 잃을 마음이 없으면 찾을 마음도 없고, 만일 마음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면 마음을 찾는다 하여 지닐 것인가,차라리 마음을 찾지 않으면 잃을 일도 없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그 답을 찾는다면 심우장으로 오십시오.만해 선생이 앉아 해를 그리던 자리를 비워두겠습니다.

글 김승희 자료 제공 성북구 문화체육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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