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현성당

기획 · 아름다운 시절⑦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

약현성당

2016.08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건축물과 장소를 소개합니다.
서울 시민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과 대화해보세요.

 

전통적으로 지켜온 약식동원

예로부터 한국인은 지역의 특징이 드러난 지역명을 쓰 는 것을 좋아했다. 이곳에 나왔던 피맛골 선생님은 마 차를 피하는 골목이라 하여 피맛골이라 불렸고, 내가 태어난 중구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지역은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아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렸 다. 이를 줄여 ‘약현’이라 일컫던 것이 고개 부근의 지명 이 되었고, 이곳에서 태어난 나는 종현(명동) 본당에 이 어 서울에서 두 번째 설립한 약현 본당이 된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지금이야 곳곳에서 성당을 볼 수 있고, 규모나 크기도 매우 다양하지만, 내가 태어난 1892년 은 100여 년간의 천주교 박해가 끝나는 시점으로 나는 서울에서는 두 번째, 전국에서는 아홉 번째 성당이 되 었다. 이는 나와 같은 성당에 신자가 모여 기도를 하고 왕이 아닌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 허용된 지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땅에 내가 생겨나기까지 겪은 험난한 과정을 잠시 돌아보면 천주교는 17세기에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되었고, 18세기 들어 문인들이 중국에서 교리를 배워오며 확산되었다. 하나 이때만 해도 조선은 계급사회로 신분제 최상위에 위치한 왕이 나라의 주인이자, 백성들에게 숭앙받는 존재였기에 만민 평등을 외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거부하는 천주교는 신분 질서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탄압 대상이 되었다. 정조는 1785년 천주교를사교(邪敎)로 규정했고, 1791년 조선 최초로 천주교도 박해 사건인 신해사옥을 시작으로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 헌종 5년(1839년) 기해박해, 고종 3년(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인 수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탄압은 거세졌지만, 천주교는 세도정치의 폐해와 사회 불안, 차별에서 벗어나고픈 서민과 여성을 대상으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마침내 선교 활동이 허락되면서 조선에도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와 함께 늘어나는 신자를 수용하고, 박해당한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이들을 처형하던 장소인 서소문 밖 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나를 세우기로 한다. 1891년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와 시공 감독을,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마침내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이자 성당 건축물인 약현성당, 바로 내가태어났다. 나는 길이 약 32m, 너비 12m의 십자형 1층 구조로, 6년에 걸쳐 지은 명동성당에 비해 매우 작았다. 당시 기술과 재정 부족으로 화려한 장식 없이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훗날나는 한국 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또 순교자가 죽어간 자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세웠다는 것은 그어떤 것보다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현재 약현성당 전경

조선 시대 한양의 출입문 가운데 하나이자 공식 처형장이 있던 서소문 거리 원경(1900년)

1906년 초기 한국천주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정약종(丁若鍾)이 저술한 <주교요지>. 우리나라 사람이 한국어로 지은 최초의 교리서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가 된 약현성당

비록 소규모 성당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사대문 밖 경기도부터 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며 넓게 퍼져 있는 신자를 아울렀다. 나를 맡은 두세 신부는교육에 관심이 많아 1895년 약현서당을 설립해 어린이를 가르쳤고, 이후 나와 함께 가명학교를 개설하고, 약명학교를 세우는 등 아동교육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1954년 한국전쟁 후, 내 구내에 위치한 가명학교 자리 에는 성요셉의원과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를 개설해 의료인 양성과 극빈자 진료에 매진했다. 이들은 훗날 가톨릭대학교 의학부와 부속병원인 성모병원이 되어 지금까지도 환자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98년 나는 비록 화재로 큰 상처를 입고 복원돼야 했지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지 100여 년이 지난 1990년, 내 옆에 서소문순교자기념관이 들어섰고, 2009년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관을 개관해 지난 120여 년간 이어온 나의 삶과, 이 땅에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역사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 중림동성당으로 불리던 나는 2007년 중림동 약현성당이라는 공식 이름을 얻었다.

나의 험난했던 청년기와 달리, 지금은 도심 속 비밀벙원처럼 고요함과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산책을 하는 이, 결혼식을 치루는 커플, 역사의 산증인인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 그들의 온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나를 있게 한다. 2018년에는 내가 자리한 서소문 일대에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상과 종교적 역사를 담은 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종교 유무를 떠나 누구든 평등을 향한 선조의 노력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이 자리를 빌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 바친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 김승희 자료 제공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