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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노래하는 나의 플레이리스트

서울을 노래하는 나의 플레이리스트>
2019.10

에세이

나의 서울

임희윤

서울을 노래하는 나의 플레이리스트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난 그 방에 간다.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창밖으로 서울시 양천구 목동의 하늘이 보인다. 빌딩이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투명한 사각형 안에 그림처럼 담긴다. 객체가 된다.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다. 그 짧은 순간을 들숨처럼 커다랗게 들이마셔본다. 갓 구운 빵을 한 입 베어 물듯, 방금 산 LP에 바늘을 올리듯. 나는 늘 게스트다. 아침 라디오 방송의 금요일 코너. 스튜디오 한쪽 벽을 차지한 그림 같은 창은 신나는 스윙 재즈도, 구슬픈 비가(悲歌)도 제 것처럼 빨아들인다. 내 마음은 창을 닮고 싶다. 돌아보니 나는 늘 게스트였다.

#1 지방 출신인 나는 상경해 연희동에 혼자 살 때부터 그 버스를 가끔 탔다. 마지막 날에 신께서 만약 단 한 노선의 버스 드라이브를 허락해준다면 난 그 버스를 고르겠다. 740번 버스. 경기도 고양시에 면한 서울 마포구 끝자락에서 강남구 삼성역까지. 서울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버스. 동진시장 앞 정류장에서 올라타면 버스는 신촌,공덕동을 거쳐 용산으로 내달린다. 미끈한 주상복합이며 아파트를 옆에 끼고 고가도로를 오르면 도시를 베고 흐르는 철로의 강을 마주한다. 전쟁기념관의 서늘한 실루엣에 잠시 멍하게 있을 즈음 버스는 우회전해 한강으로 향한다.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버스는 반포대교 대신 잠수교에 주저 없이 올라탄다. 세빛섬의 조명, 한강 물길을 따라 자전거 타는 사람들. 문득 눈을 들면 성모병원이 다가선다.

#2 서울은 높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다. 남산서울타워에서도, 롯데월드타워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짜 서울을 보려면 때로 버스를 타야 한다. 조그만 이어폰이나 커다란 헤드폰을 들고서. 버스 안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어떻게 잊을까. 그 노래들은 팝송이고 가요고 간에 서울의 노래가 돼줬다. 노을 질 무렵 470번을 타고 남산1호터널로 가는 고갯길. 명치끝을 따끔하게 만드는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와 ‘이브나’. 472번을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던 밤, 차창 밖 조명을 추상화처럼 번지게 만든 화지의 ‘잘 자, 서울’. 서대문03번을 타고 경의중앙선 신촌역 정류장에 내려설 때 심장을 함께 내려앉게 만든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 서울 여기저기에 노래가 묻어 있다. 난 그 노래들을 지우지 못한다.

#3 신께서 날짜를 착각해 하루, 한 노선을 더 허락해주신다면 그때엔 7013A 버스를 타볼까. 강에서 안타깝게 조금떨어진 탓에 강변을 바라보는 아파트와 건물의 뒤통수만 차례로 보며 가는 노선. 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시장까지 연결되는 것도 좋지만, 내 선호는 순전히 마포대교 북단의 입체교차로 때문이다. 롤러코스터처럼 가파르고 둥근 궤적을 그리며 한강을 향해 뛰어들듯 다가섰다 멀어지는 그 부분 말이다. 하이라이트. 교차로로 올라서는 순간에는 못의 ‘카페인’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모든 중력을 다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내게’ 주고픈 생각에까지 사로잡히고 만다.

#4 한강과 다리는 가장 많은 노래가 묻어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한강 다리에 관한 노래를 전수조사한 적이 있다. 가요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한 곳은 양화대교. 알다시피 자이언티는 양화대교에 ‘양화대교’를 묻혀뒀다. 마포대교, 성수대교가 뒤를 이었다. 그다음은 한남대교와 잠수교. 잠수교는 침수되기 일쑤인 작은 다리지만 머리에 인 커다란 반포대교보다 노래에 두 배 넘게 많이 등장했다. 박영민은 잠수교에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를, 윤수일과 주현미는 영동대교에 ‘아파트’와 ‘비내리는 영동교’를 새겨놨다. 최근에는 한강대교가 통과하는 노들섬이 공연장을 갖춘 음악의 섬으로 다시 태어났다. 751번을 포함한 다양한 버스가 정차하는 데다 몇 년 뒤 잠수교처럼 보행전용교도 신설된다고 하니 이 섬에 앞으로 어떤 노래가 깃들지 기대된다.

이제 나는 서 있네. 그 다리 위에….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중.

“이제 나는 서 있네. 그 다리 위에….”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중.


#5 이문세의 ‘옛사랑’이 홍콩 출신 미국 감독 웨인 왕의 신작 영화 <커밍 홈 어게인>(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에 담겼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로 시작하는이 노래는 극 중 주인공 창래의 아버지가 다른 사랑을 했음을 은유하는 중요한 장면에 흐른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이민 가정. 서울 풍경은 조금도 등장하지 않는 영화이지만 노래가 화면에 서울을 묻혀뒀다. “흰눈 내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노래 속에서 들판에 있던 이는 추억을 찾아 도심으로 간다. 그가 한 사랑의 배경은 목가적 애수가 아닌 셈이다. 욕망이 끓는 치열한 삶의 전쟁터, 서울 한가운데의 뜨겁고 세련된 사랑이다. 그 도시의 사랑은 어쩌면 조금 통속적이고 치사했을지도

#6 해 질 녘의 740번 버스. 그 안에 오도카니 앉아서 오늘도 누군가는 잠수교를 건널 것이다. 멀리 섬을 바라보며.

임희윤

임희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러 음악가를 인터뷰하고 여러 도시를 돌며 음악 산업현장을 취재한다.
매주 SBS 라디오 파워FM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MBC FM4U의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
<2시의 데이트>에 출연한다. 저서로 <망작들 3>이 있다.

임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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