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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여름날은 아름답다

서울의 여름날은 아름답다>
2019.08

에세이

나의 서울

최갑수

서울의 여름날은 아름답다

늘 그곳에, 그 자리에

아내와 함께 ‘한양도성길’을 걸었다. 한양도성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인 낙산(동)과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을 연결해 만든 성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 10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만들었다. 유득공이 그의 책 <경도잡지>에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 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고 한 것을 보면 예부터 걷기 좋은 곳이었던 모양이다.

몇 해 전, 취재차 혼자 한양도성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녔다. 취재였던 데다 혼자였으니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둘이었다. 사진 역시 찍어도 그만, 안 찍어도 그만. 운동화를 신고 배낭에 오이 몇 개와 물 두 통을 챙겼다. 코스는 인왕산 구간과 백악 구간으로 잡았다.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 정상을 지나고 창의문과 숙정문을 거쳐 혜화문에 닿는다. 총 6시간 정도 걸린다. 인왕산 구간 초입부터 숲은 짙은 초록이었고 그늘은 깊었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길의 경사는 그다지 급하지 않아 동네 뒷산 오르듯 천천히 걸었다. 어디쯤 왔나 문득 뒤돌아보니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이 펼쳐졌다. 광화문과 경복궁, 청와대가 아득했고 멀리 남산타워도 보였다. 섭씨 32도. 하지만 인왕산 정상에서 맞는 날씨는 초가을 같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시원했다.

한양도성길의 좋은 점은 힘들면 아무 데서나 내려오면 된다는 것이다. 백악 구간이 끝나는 청운동 일대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하숙하며 산책을 즐기던 곳이다. 이곳에 윤동주문학관이 만들어져 있다. 독특한 풍경을 지닌 곳으로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한국의 현대건축베스트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건축가 이소진에게 2012년 ‘젊은 건축가상’을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건물은 윤동주의 시처럼 단아하다.

아내와 함께 햄버거도 먹었다. 유쾌한 청들이 운영하는 햄버거집. 아보카도가 듬뿍 들어간 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콜라를 주문했다. 힘들게 걸었으니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한 입 베어 물자 두툼한 패티에서 육즙이 가득 흘러나온다. 토마토도 신선하다. 콜라 한 잔에 백악 구간의 수고가 싹 씻겨나간다.

더 걸어볼까?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내처 혜화문까지 가기로 했다. 이 구간은 초반이 힘들다. 창의문에서 돌고래 쉼터를 지나 백악마루까지 가파른 계단이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가파른 숨을 내쉬며 걷고 쉬고 걷다 보면 40분에서 1시간 정도가 걸린다. 탐방 길에는 경사가 가파르니 주의하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다.

땀깨나 쏟으며 닿은 백악마루.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도 보인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다.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 서울

혜화문 지나 낙산까지 걸음이 이어졌다. 낙산은 내사산 중에서 가장 낮다. 해발 124m.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창경궁과 창덕궁 등과 가깝고 계곡이 맑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봉유설>을 쓴 실학자 이수광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이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인왕산 구간 초입부터 숲은 짙은 초록이었고 그늘은 깊었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길의 경사는 그다지 급하지 않아 동네 뒷산 오르듯 천천히 걸었다.어디쯤 왔나 문득 뒤돌아보니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이 펼쳐졌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시원했다.

낙산에 조금 이르게 도착해 이화동 구경에 나섰다. 재미있는 곳이 많다. 고양이 책만 파는 서점도 있고 서울의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만한 카페도 있다. 마음에 드는 어느곳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낙산공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다리도 쉴 겸 낙산공원 아래에 자리한 ‘밀크공방’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우유 아이스크림을 시켜 한 스푼 떠먹었다. 우유 맛이 진했고 달콤했다. 뭔가 좋은 기분이 뭉게구름처럼 가슴 한편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한국의 여름이 갈수록 혹독해진다고 하지만 이런 산책 1시간과 이런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이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군” 하는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낙산 구간을 걷고 이화동 골목을 어슬렁거리기를 2시간.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내처 흥인지문까지 갈까,아니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다가 낙산공원에서 노을을 맞을까…. 나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벌써 서울에 산 지 20년째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됐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러버린 거야.’ 나는 아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서울이 이렇게 이뻤구나.” 아내는 남산타워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고 어느 여름날 그 시간을 함께 뒤돌아보고 있다. 낙산공원에서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하늘을 보니 오늘 노을이 참 좋을 것 같았다.

최갑수

최갑수
시인·여행 작가. 1년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낯선 호텔에서 보낸다.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그 도시와 여행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일이다. 얼마 전 여행 사진 에세이 <밤의 공항에서>를 펴냈다.

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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