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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구슬땀으로 기록된 스포츠 문화유산, 전국체육대회

100년의 구슬땀으로 기록된 스포츠 문화유산, 전국체육대회>
2018.12

문화

서울 인문학 살롱

잘 생겼다! 서울 인문학 살롱 ⑪

100년의 구슬땀으로 기록된 스포츠 문화유산, 전국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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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로,
지역 체육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한 토대로,

"그리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스포츠 경기 대회이자 대표적 스포츠 문화유산인 전국체육대회가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다."
2019년 10월 제100회 대회를 앞두고 전국체육대회의 한 세기를 더듬어본다.




“영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5월 2일 동소문 밖으로 야유회를 갔다. 마음과 지식을 키우는 것도 매우 소중하지만, 몸을 튼튼히 키우자면 맑은 공기 속에서 운동하고 목욕을 자주 해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1896년 외국어학교 운동회를 취재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 중 일부다. 1896년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근대 올림픽이 처음 개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 운동회가 열린 해다.

우리나라에 근대 스포츠가 유입된 것은 갑오개혁 때로, 선교사와 외국인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통해 축구, 농구, 배구, 야구, 정구 등이 소개됐다. 더불어 나라에서는 1895년 신교육령 반포를 통해 덕육(德育), 지육(智育)과 함께 근육과 뼈대를 튼튼히 해 무병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자는 뜻에서 체육을 3대 강령으로 채택했다. 1895년에 설립한 최초의 공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에서는 교과과정에 체조를 과목으로 두었고, 같은 해에 설립한 외국어학교는 근대 한국 체육 사상 체육을 가장 강조하기도 했다. 외국어학교에서 처음으로 운동회가 열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학교 운동회는 단순한 놀이나 오락이 아닌, 국가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기가 곧 나라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렇게 학생들이 모여 운동회를 가질 때 국기를 모시는 것은 조선 인민들이 차차 조선도 다른 나라들처럼 세계 속에서 자주독립하자는 뜻이 담긴 것이다.”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은 참가 학생들에게 국기인 태극기를 소중히 여기라며 이렇게 훈시했다. 또 경기가 끝난 뒤에는 학생들의 군산훈련 시범에 이어 시상식을 진행했는데, 이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적 결의를 보여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제 입장에서는 학교 운동회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방해를 한일제 때문에 학교 운동회는 1909년 4월 30일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제67회 전국체육대회

‘아시안의 서울답게, 86·88 주인답게’라는 슬로건 아래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1986년 제67회 전국체육대회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전국체육대회의 기원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각종 운동은 학교 체육뿐 아니라 사회체육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이에 1920년 7월에 ‘조선체육회’가 결성되었다. 앞서 결성된 조선체육협회가 일본인 주도로 만든 일본체육협회 조선 지부였다면, 조선체육회는 3·1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도쿄 유학생 출신 체육인들과 YMCA 운동부, 동아일보 기자, 종교인, 의사, 은행가 등 선각자들이 만든 우리 민족만의 체계화된 조직이었다.

조선체육회는 첫 경기로 그해 11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가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의 기원이다.

전조선야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조선체육회는 이듬해에 제1회 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야구·축구·육상·정구 등을 단일 종목별로 차례차례 개최하면서 점차 체육 활동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은 종목인 축구나 야구 경기의 규칙이 일본 것을 그대로 베낀 데다, 이를 운용하는 심판도 경기 규칙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선수들은 걸핏하면 떼를 쓰기 일쑤였고, 이에 부응해 응원단도 소란에 일조했다.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

전국체전의 기원이 된 1920년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고 있다.

경성운동장

1925년에 개장한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하는 모습

제34회 전국체전

전쟁의 폐허를 딛고 1953년에 열린 제34회 전국체전. 여고부 선수가 경기를 펼치고 있다.

제32회 전국체전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피난지 광주시에서 제32회 전국체전이 개최되었다

손기정 선수 등 한국 선수들 일본 선수 압도

1929년에는 3개 대회를 합해 처음으로 종합 대회를 치르기 도 했다. 이것이 제10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로, 이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15회부터 부활해 1937년 18회까지 이어졌다. 종목도 다양해지고 선수들 기량도 향상되어 많은 종목에 서 일본인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손기정 선수가 마 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전후해 그 수준이 절정에 다다랐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체육 단체 통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1938년 조선체육회를 조선체육협회와 강제로 통합해버렸 다. 이로써 전조선종합경기대회는 1937년에 개최한 18회 대 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고, 해방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1945년 10월에 서울운 동장에서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제26회 전국체전으로 기산(起算)하는 대회였다. 이 대회 개회식에 서 이승만은 “저기 태극기를 든 선수가 손기정 선수가 아닙 니까? 내가 미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방랑의 슬픔을 맛 보고 있을 때 손 선수의 마라톤 세계 제패 소식을 듣고 우리 민족이 아직 기개를 잃지 않고 있다고 여겨 얼마나 고무되었 는지 모릅니다”라고 축사를 했고, 개회식 태극기 기수로 입 장한 손기정은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이후 전국체전은 1951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열리는 등 고난과 역경에서도 끊이지 않고 진행되었다. 전국체전은 초창기에는 주로 서울에서 열렸다. 일본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긴 했으나, 근대적 국제 규격을 갖춘 경 성운동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운동장은 훗날 서울운동 장,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970년 초반까지 전국체전 단골 개최지로, 우리나라 체육의 요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전국에 운동장이 건설되고 서울과 지방의 균형 있는 체육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지방 순회 개최를 실시 해 1957년 제38회 부산 대회를 기점으로 각 지역 대도시에 서 열려 지방 체육의 제1도약기를 맞이했다.

손기정 선수

1945년 성대하게 열린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 태극기를 든 손기정 선수가 감격해하고 있다.

1959년 대관령에서 열린 제4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키 활강 경기.

1959년 대관령에서 열린 제4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키 활강 경기.

100주년 맞아 북한 참여로 하나 되는 통합의 체전이 되기를

1920년 시작해 중일전쟁(1937년)과 조선체육회 강제 해산 기간(1938년, 1940~1944년), 한국전쟁 발발(1950년)을 제 외하고 매년 개최해온 전국체전이 2019년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린다.

서울시는 이번 전국체전을 역대 대회와 달리, 우리나라 체 육 100년 역사 속에서 전국체전의 역할과 의미를 부각하는 대회이자, 전 국민이 함께하는 친근한 대회로 한 걸음 나아 가는 계기가 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남과 북이 함께 한 한민족 체육대회였던 만큼 100회를 맞은 이번 대회에 북한이 참여함으로써 한반도 화합의 길을 여는 전 국체전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100회 전국체전은 내년 10월 4일부터 7일간 잠실 종합운동장 등 서울 시내 69개 경기장에서 열리며, 17개 시도 선수단과 18개 해외 동포 선수단 등 3만여 명이 참가한다. 그 뒤를 이어 6,0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제39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가 10월 15일 부터 5일간 잠실 종합운동장 등 32개 경기장에서 열린다. 올해 전북에서 개최된 제99회 전국체전에서 2위를 기록한 서울시에 서는 체조, 태권도, 조정, 핸드볼, 자전거, 펜싱 등 46개 종목에 참가하는 한편, 전력을 보강해 지난 1995년 제76회 대회 이후 24년 만에 정상 탈환을 노린다는 계획이다.

전국체전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매개체 역할 을 했고, 이후 체육 인프라 확 대와 지역 체육의 균형 있는 발 전을 견인해온 국내 최고의 스 포츠 경기 대회이자 스포츠 문 화유산이다. 그리고 2019년 100주년을 맞아 ‘평화의 체전, 하나 되는 통합의 체전, 미래 100년을 그려나가는 체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제 95회 전국체전

서울시직장운동경기부 간판스타인 전희숙 선수의 제95회 전국체전 경기 모습

전국체전 엠블럼

제100회 전국체전 엠블럼은 뫼비우스 형태의 숫자 100과 서울을 상징하는 ‘S’자 모양 성화로 제100회를 기념한다. 전국장애인체전은 경기장 트랙을 상징하는 숫자 39와 서울을 상징하는 ‘S’자의 성화로 성공적인 체전의 염원을 담았다. 마스코트 ‘해띠’는 서울의 상징인 ‘해치’와 친구의 순우리말인 ‘아띠’를 붙여 만들었다. 장애인체전 마스코트 ‘해온’은 ‘해치’와 즐거움의 순우리말인 ‘라온’을 붙여 만들었다.

서울시청 소속 선수단

40년 역사와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는 서울시청 소속 선수단

서울시 선수단 중에는 서울시청 소속 선수도 있다. 서울시직장운동경기부 소속 선수들로, 올해 전북에서 열린 제99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획득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서울시직장운동경기부는 양궁, 펜싱, 여자 축구를 비롯한 20종목 21개 팀 134명의 선수로 구성되었다. 펜싱의 전희숙 선수를 비롯해 자전거의 김현지, 체조의 김한솔, 여자 핸드볼의 송해림 등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18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와 제99회 전국체전에서 금·은·동메달을 딴 간판급 선수다.

이정은사진 홍하얀

촬영 협조 한국체육박물관

참고 자료 대한체육회 9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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