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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흥기, 파리의 혼란기

기획 · 역사 속 평행이론

서울의 중흥기, 파리의 혼란기
2017.08

서울

서울, 상공업 도시로 나아가다

1791년. 조선의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했다. 이 조치는 신해년에 이루어졌다 하여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부른다. 정조의 할아버지이자 ‘영·정조 르네상스’의 문을 연 영조가 청계천 준설을 마무리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이 양란 이후 한양의 중흥기를 여는 인프라 사업이었다면, 신해통공은 서울의 상공업 발달을 위한 규제 철폐 정책이었다.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도를 정비하면서 산업이 발달해 한양은 중흥기를 맞이했다.

금난전권이란 이름 그대로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권리다. 시전이 국가 공인 상점이라면, 난전은 무허가 상점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숙종 32년(1706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전안(廛案: 시전 목록)에 등록되지 않은 상점을 난전이라 불렀다. 왕실은 시전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는 대가로 한양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 아래 10리까지의 지역)까지 난전의 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주었다. 이 금난전권은 난전이 시전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한양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종로의 시전 상가 이외에도 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 등에 대규모 난전이 들어섰다. 특히 어물전으로 유명하던 칠패의 난전 상인들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해산물을 싹쓸이하다시피 독점해서 시전 어물전에는 물건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행사하며 저항(?)했으나, 난전 상인들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앙 권력층과 결탁해 금난전권 폐지 운동을 벌여나갔다. 그 결과가 신해통공인 것이다. 왕실에 필요한 물건과 함께 나랏일에 필요한 경비까지 세금으로 내야 했던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유지되었으나, 이미 난전은 시전을 압도한 상황이었다. 칠패와 이현을 넘어 도성 내 큰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났다. 그야말로 ‘난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덕분에 한양은 명실상부한 상공업 도시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프랑스

시민이 주축이 된 프랑스혁명

서울이 중흥기를 맞이할 무렵, 프랑스 파리는 극심한 혼란기를 지나고 있었다. 신해통공을 시행하기 딱 2년 전, 그 유명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왕비의 말에 흥분한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해버렸다. 훗날 이 말은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였음이 밝혀졌으나, 혁명은 이미 파리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조선의 난전 상인들이 만세를 부른 신해년(1791년), 혁명 세력을 피해 처가인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던 루이 16세 부부가 체포되었다. 파리 시민들이 주축인 프랑스혁명군은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2년 뒤, 한때 절대 권력을 누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울의 중흥과 파리의 혼란. 아쉽게도 두 도시의 역사는 곧 반전을 맞이한다.

구완회(작가)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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