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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성균관 유생과 70년 대학 문화의 소환

600년 전 성균관 유생과 70년 대학 문화의 소환>
2017.04

문화

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600년 전 성균관 유생과 70년 대학 문화의 소환

천 원 지폐의 앞면은 퇴계 이황과 조선시대 국립대학이던 성균관이 그려져 있다.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던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지금의 수능 시험 격인 ‘생원진사시’에 합격해야 했고,
‘신방례’라는 신입생 환영회도 치러야 했다.
과연 성균관 유생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그리고 2017년 현재까지 우리나라 대학 문화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정(丁) 모(某)가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훗날 반드시 명성을 떨칠 것이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이 제출한 ‘<중용강의> 80여 조에 대한 답안지’ 중 정약용의 대답이 가장 뛰어나다며 이처럼 칭찬했다. 성균관 유생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치르는 시험에 번번이 높은 성적으로 선발되어 정조에게 서적과 지필을 하사받는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관직 등용문인 과거 시험에는 무려 열아홉 차례나 떨어졌다. 왜? 집권당의 부정부패와 견제 때문이었다. 부패한 조선 사회에 비판적인 정약용의 답안지가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었던 것. 정약용뿐 아니라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성균관은 조선 시대 국립대학이었다. 유생들은 요즘 수능 시험처럼 ‘생원진사시’라는 시험을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사학에 다니는 15세 이상 유생 중 학업 성적이 우수한 자, 3품 이상 관리의 자제로 <소학>에 능통한 자는 시험 없이 특례 입학을 하기도 했다.

‘음주’ 신입생 환영회, 성균관에서도 문제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 생활을 했는데, 식사는 물론 공부에 필요한 종이, 붓, 먹까지 제공받았다. 전액 국비 장학생이었던 셈.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시쳇말로 ‘빡셌다’고 한다. 미명에 북이 한 번 울리면 일어나고, 북이 두 번 울리면 의관을 갖추고 정좌하여 독서를 했다.

또 북이 세 번 울리면 식당 앞에 정렬해 서로 마주 보고 읍한 뒤 차례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실 때는 ‘권번’, ‘진수’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학관에게 읍하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실력에 따라 우열반으로 나누었다. 저녁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든 유생들은 3명이 한방을 썼다. 몰래 방을 나와 달빛 아래서 ‘열공’하는 유생도 많았다. 과거 시험 합격생이 30명 정도에 불과하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 골치 아픈 신입생 환영회가 성균관에서도 성행했다고 한다. ‘신방례(혹은 접방례)’가 그것으로, 몸이 약한데도 과음을 권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선배들의 집단 구타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온몸에 진흙과 오물을 칠하기도 해 권위 있어야 할 문화가 ‘저질’ 문화로 발전해갔다. 이 때문에 상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중종은 술과 음식을 강요한 선배들에게 ‘과거 응시 금지’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했다. 유생들의 시위도 빈번했다. 유생들은 오늘날로 치면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재회를 통해 내부 문제를 자치적으로 해결했다. 그뿐 아니라 조정에서 부당한 처사를 내리면 재회를 열어 유소를 올리고, 만약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소행(집단 시위)이나 권당(수업 거부, 단식투쟁) 또는 공관(동맹 휴학) 등 실력 행사로 맞섰다.

조선 왕조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성균관은 주자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보다 집권 양반 자제들의 입신 출세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신교육제도를 실시할 때까지 최고 교육기관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1970년대는 ‘청. 통. 생.’

그럼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학 교육은 언제부터 이루어졌을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를 광복 이후로 본다. 19세기 말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연희 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으나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과 고등교육 억제 정책으로 대학 수준의 학교로 발전하지 못했다.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재탄생했고, 전문학교가 점차 확대 발전해 현재의 사립대학이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유럽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지난 70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경제성장을 견인했고,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며 민주화를 이루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유신 독재와 긴급조치로 억압받던 1970년대, 지성인들의 결집체인 대학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당시 억눌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응축된 대학생들의 반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청. 통. 생.’으로 분출되었다. 청바지에 머리를 길게 기르고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생맥주를 즐겼다. 또 대학가요제로 열기와 낭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노래들이 음반 차트를 휩쓸었고, 대학가요제 출신의 송골매와 옥슨80은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문화의 다양화로 인기가 사그라져 2012년 36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추정하는 소과 시험 응시 그림(문화재청)

1977년에 처음 열린 대학가요제는
어수선한 시국 상황에서 대학생들의 참여가 높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2006년에 열린 대학가요제 모습.

1980년대 대학 문화는 학생운동 문화, 이념 문화로 대변된다.
캠퍼스에는 최루탄과 페퍼포그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사진은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군의 영정을 앞세우고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
1987년 7월 6일.

1980년대는 학생운동

1980년대 대학은 학생운동으로 점철된다. 시위는 일상적이었고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중가요보다 민중가요를 더 많이 불렀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국민은 분노했고,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숨진 이한열을 보며 폭발했다. 대학생들은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며 강의실이 아닌 거리에서 1987년 봄과 여름을 맞았다. 그리고 6·29선언으로 학생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쟁취했다. 격동의 10년 동안 대학 문화도 1970년대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노래패, 풍물패, 사회과학 독서 토론회, 교지 편집회가 대학 동아리의 주축을 이루었고, 축제도 대동제라는 이름을 달고 향락적인 행사에서 건전하고 생산적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부터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성장기를 보냈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화적 혜택도 많이 누린 이른바 X세대, 오렌지족이 등장하면서 이전과 다른 문화가 형성 되었다. 학생운동으로 획일화되던 1980년대와 달리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형성됐으며, 배낭여행·어학연수·교환학생 등으로 보다 글로벌해졌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대학과 대학 문화는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다. 졸업 후 취업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는 것. 정부의 대학 줄 세우기에 대학은 학문 탐구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취업교육’, ‘창업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들은 취업과 스펙을 위해 동아리를 선택하고, 허리가 휘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필수로 한다. 스펙을 쌓기 위한 휴학은 당연한 코스가 됐고, 편입 열풍도 거세다.

각종 게시물이 붙은 학생회관. 동아리, 봉사 활동, 취업·창업 관련 자료가 주를 이룬다.

공부하랴, 방 구하랴 바쁜 대학생들.

취업난으로 낭만도 여유도 없는 캠퍼스

지난 3월 23일 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풋풋한 젊음과 낭만을 기대했으나, 강의실과 도서관을 찾아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조급함만 보였다.

“취업 생각밖에 없어요. 성적도 높게 유지해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해서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과 동아리실에서 보내요.” 구내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이난경(22세, 4학년) 씨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도서관으로 종종걸음쳤다. 3~4학년뿐 아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요즘 캠퍼스 풍경이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교정에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어도 중간고사 공부 때문에 마음 놓고 구경할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 속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고, 대학 입학 후에는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또다시 경쟁 속에서 숨 막히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생들. 600년 선배인 성균관 유생들은 이 후배들을 보고 뭐라고 말할까? 현실에 꿈을 저당 잡힌 청춘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어 도종환 시인의 시구로 갈무리한다.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고려대학교 본관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했으며 1934년 9월에 준공했다. 당시 건축설계는 일본인이나 서양인이 주로 맡았는데,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김성수는 우리나라 건축가인 박동진에게 맡겼다. 1937년에 완공한 도서관도 그의 작품이다. 본관은 고딕식 석조 콘크리트 건물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데도 중량감이 느껴진다. 건물 평면은 ‘H’자 모양으로,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다. 본관 중앙탑 부분의 현관 좌우 돌기둥에는 호랑이를 새겼고, 후문의 입구 좌우에는 무궁화를 새겼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건국대학교 구 서북학회회관

1907년경 종로구 낙원동에 애국 계몽 단체 ‘서북학회’ 회관으로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당시 종로2가에 있던 르네상스 양식의 한미전기회사 사옥을 모방해 지었다. 1910년 신식 교육기관인 오성학교 교사로 사용했으며, 1918∼1922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활용했다. 한국전쟁 후 건국대학교에서 사용하다가 1977년 도시계획으로 철거, 해체한 뒤 1985년 지금의 건국대학교 교정으로 이전, 복원해 상허기념관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소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

이화여자대학교 파이퍼홀

1935년 3월에 건립했으며, 기부자인 미국의 파이퍼(Pffeiffer) 여사를 기념해 건물 이름을 ‘파이퍼홀’로 명명했다. 튜더식 고딕을 기본으로 한 건축물로, 건물 외벽은 특유의 석조 건축 기법인 ‘애슐라(ashlar) 쌓기’를 적용했다. 홀 중앙부 3층의 사각 창호에는 창문을 장식하기 위해 석재 트레이서리(tracery)를 설치했고, 건물 후문에는 베이 윈도와 납작 아치를 설치해 멋을 살렸다. 창과 문, 계단 난간, 바닥 타일까지도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

특수 대학이던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자리한 곳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즉 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있던 자리다.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지은 다산관, 청학관, 대륙관은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특히 다산관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로고에도 등장할 정도로 이 대학의 상징적 건물이다. 이공학부 건물로 지은 까닭에 우아한 조형미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했다.

주소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관은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H. G.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 지상 3층 중앙부에는 5층 높이의 탑옥(塔屋)이 있고, 중앙 현관문에는 튜더풍 아치가 있으며, 나머지 창은 화강석을 수평 아치로 처리한 준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현재는 대학본부로 사용하며 좌우에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이 있는데, 이 두 곳 역시 근대 문화유산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방송통신대학교 구 공업전습소

공업전습소는 염직, 직조, 제지, 금은세공, 목공 등 근대 기술을 교육한 기관으로 1907년에 건립했다. 멀리서 보면 회백색을 띠어 석조 건물 같지만 사실 목조 건물이다. 목조 2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외벽은 나무 비늘판 붙이기로 시공했고, 지붕은 기와 이음으로 마감했다. 광복 후에는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와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으로 사용했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기록관으로 쓰고 있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86

‘꿀알바’하면서 두 다리 뻗고 자보자



‘한 지붕 세대 공감’으로 주거 지원

서울시가 추진 중인 ‘한 지붕 세대 공감’은 60세 이상 어르신이 대학생에게 남는 방을 보증금 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고, 학생은 노인에게 생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업에 참여하는 어르신은 1실당 100만 원 이내에서 환경 개선(도배·장판·싱크대 보수 등, SH공사 시공)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 대학생은 보증금 없이 저렴한 가격에 거주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문의는 각 구청 주택과.



대학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금 이자 지원

서울 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금 이자를 지원한다. 한국장학재단에서 대출(일반 상환 학자금,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받은 서울 지역 대학생이라면 서울시 홈페이지(seoul.go.kr)에서 신청 가능하다. 대상자는 대출 당시 서울에 주소를 두고 서울 소재 대학교에 재학(휴학) 중인 학생, 서울 소재 고교 졸업 후 대학교에 재학(휴학) 중인 학생, 대출 신청일 현재 기초생활수급권자, 소득 10분위 중 하위 1분위부터 8분위에 해당하는 서울 지역 대학생으로 한정한다.



5시간에 3만7,350원 ‘꿀알바’

방학이면 관공서 아르바이트가 서울시 대학생을 기다린다. 관공서 아르바이트는 ‘꿀알바’! 쾌적한 근무 환경에 칼퇴근과 행정 업무까지 배우는 ‘일석삼조 알바’기 때문. 경쟁률이 높아 각 지자체에서는 지원 자격을 현재 소속 지자체 거주자로 한정하거나 관공서 알바 미경험자에게 기회를 먼저 준다. 지자체의 모집 공고를 확인한다.

서울시립대학교 반값 등록금

서울시립대학교는 2012년부터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고 있다. 서울시가 등록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울시립대의 재정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학교는 인문계열은 한학기 등록금이 102만 원이고, 이공계는 120만∼130만원 수준이다. 예전 등록금의 50% 수준이어서 ‘반값’이라고 하지만 실제 다른 대학들의 등록금과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다.

이정은 사진 홍하얀 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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